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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Mar 22. 2020

코로나 시대, 작년 시칠리아에서 만난 그를 떠올리다

낯선 현지인이 전해준 이탈리아의 민낯, 비극이 어서 끝나길 기원하며

그를 만난 건 시라쿠사 두오모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노천카페였다. 보통의 관광지 카페가 그렇듯 커피도 빵도 맛이 없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두오모 광경이면 충분했다. 이날 저녁 팔레르모행 비행기를 타야 했으므로 사실상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뭘 할지 계획이 없었으므로 슬슬 계획이나 짜며 멍 때릴 생각이었다. 


그를 만난 시라쿠사의 카페


아메리카노 한 잔과 빵을 계산하고 자리에 왔는데, 한 현지인이 내 자리에 놔둔 카메라를 봐주고 있었다. 혹시나 누가 가져갈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여행 중인지 등 자연스레 대화를 나눴다. 근 일주일째 혼자 여행을 했던 터라 간만의 긴 대화가 반갑기도 했고, 몇 마디만 나눠도 좋은 사람인 게 느껴져 경계심이 풀렸다.


오늘 계획을 물었는데, 몹시 지쳐있던 난 계획이 없었고, 노토나 라구사에 가볼까 싶었는데 교통편을 검색해 보니 버스가 하루에 2-3번만 운행해 자포자기했던 차였다. 그는 노토는 차로 20분밖에 안 걸린다며,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위험할 수도 있는 제안이었지만 여행 마지막 날이라 모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페에 앉아있던 짧은 시간 동안 친구들 여럿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동네 토박이란 게 명확해 더 믿음이 갔다.



그는 집에서 아주 작은 차를 끌고 나왔고, 노토까지 가는 짧은 길에 내 주문에 따라 CD를 여러 개 바꿔가며 틀어줬다. 이탈리아에선 아직 MP3보다 CD가 많이 소비되는지, 그만의 취향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엄청난 양의 CD를 차에 두고 있었다. 당시 내 여행의 테마가 영화였던 걸 아는 듯, 그는 '대부'와 '시네마천국' 등 각종 OST를 틀어줬다. 이태리인들이 기본적으로 이 정도 소양을 갖추고 있는진 알 수 없으나 그는 영화와 음악, 오페라 모든 지식에 해박했다.



노토에서의 일정은 간단했다. 넷플릭스 '셰프스 테이블' 페이스트리 편에 등장한 코라도 아센차의 '카페 시칠리아'에서 까놀로와 젤라떼리아를 먹는 게 미션이었으므로 일단 이것부터 수행. 이곳은 과연 유명 다큐에 등장한 만큼 노토 촌구석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진 분위기였고 사람도 많았다. 근데 그는 이곳이 뭐가 훌륭한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자기가 즐겨 간다는 리스토란테로 인도했다. 


일가족이 운영하는 전형적인 시칠리아 동네 음식점이었는데, 귀여운 꼬마 아이가 주문을 받으며 부모를 돕는 게 인상적이었다. 파스타 맛은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은 수준이었고 역시나 찾아보니 구글 평점이 2점대였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현지의 느낌이 강하게 남는 시간이었다. 한가롭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우리의 대화도 좋았다.


노토의 리스토란테


아무래도 내가 영화에 관심이 많고, 막 대부 촬영지였던 사보카와 포르차 다그로를 다녀온지라, 그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영화광이었다. 내가 언급하는 영화나 배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그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을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다. 그가 정확히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말해서, 이 용어가 콩글리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는 이탈리아계이지만 미국인인 프란시스 코폴라가 감독한 '대부'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훨씬 명작이라고 했다. 


이탈리안 아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엔니오 모리꼬네, 니노 로타 등 영화음악가뿐 아니라 Norma, Castadiva 등으로 유명한 벨리니가 시칠리아 카타니아 출신이란 걸 그로 인해 처음 알았다. 그는 레이디 가가, 마돈나, 로버트 드 니로, 실베스터 스탤론, 마틴 스콜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고 알려줬다. 알 파치노는 부모님이 시칠리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이민자 출신으로, 외조부는 무려 콜레오네 출신이라고 하니 그의 대부 캐스팅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안타까웠던 건 수많은 우수한 이탈리아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 친구들도 대부분 일자리를 구하러 이민을 갔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내수경제가 관광, 외식업을 빼놓고 침체 그 자체란 것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탈리아는 대학 배낭여행 때부터 시작해 최소 세네 번을 왔지만, 여행의 천국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80% 이상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출신이라고 한다. 북부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름다운 시칠리아가 왜 이리 애틋하게 느껴지던지. 


현지인과의 만남은 여행의 농도를 채워주는 대체 불가능한 경험이다. 이탈리아의 민낯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와의 만남 덕분일 것이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친절과 우정을 베풀어준 그. 작년 12월 갑작스럽게 떠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그런 고마운 현지인들을 많이 만났다. 로마나 피렌체와 달리 물가도 싸고 소박하고 따뜻한 정이 넘쳤던 시칠리아.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에도 코로나19가 덮칠지 불과 3개월 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조그마한 섬 시칠리아에 확진자가 340명에 육박하고, 그나마 확산을 막기 위해 본토와 항공편을 하루 두 대로 제한했다고 한다.



요즘 이탈리아 뉴스를 볼 때면 그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여행과 미식, 패션, 예술의 나라가 이처럼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왜인지, 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국가 시스템과 정치, 공공의료 체계, 내수 경제, 재정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는 요즘이다. 우리나라도 확진자 수가 9000명에 육박하는데 남의 나라 걱정할 때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우리나라는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을지언정 곧 극복할 거라는 확신이 드는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잘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사망자 수는 발원지인 중국을 뛰어넘었다.


유럽에서 박사 유학을 하던 후배들이 거의 엑소더스급 탈출을 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유학하던 후배는 스페인 정부가 봉쇄령을 내려 산책만 해도 벌금을 내게 되자 급히 비행기표를 구해 한국으로 왔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후배는 프랑스에서 의료진을 위한 마스크도 없어서 난리라며, 이번 사태로 프랑스의 '후진국성'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토로했다. 



열흘 전쯤 페이스북 메신저로 그에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괜찮다던 그는, 오늘 다시 연락하자 시칠리아는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다시 이탈리아에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올해는 힘들겠지?라고 물으니 내년에 오라고 한다. 내년엔 갈 수 있을까? 정말 이러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군용 차량을 이용해 관을 옮기는 전쟁과 같은 비극 속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의 흥과 긍정 마인드는 죽지 않았다. 격리 중에도 발코니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시간을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 부디 바이러스가 그들의 예술성을 죽이지 않길. 다시 그곳을 찾아 낯선 친구를 사귈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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