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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악당과 현재

소행성 2, 폭싹 속았수다

by 해산

천국의 소행성 2의 이름은 '당신의 악당들'입니다.

소행성 2의 주요 메시지

'어떤 미움은 살다 보면 이해로 남는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은 대략 난감에 처리 곤란일 때가 많았다. 얌전하고 착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각종 장난꾸러기 짓과 괴롭힘으로 돌아버릴 지경까지 몰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긴 자갈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여느 날처럼 친구와 함께 자분자분 돌을 밟으며 걷던 아침에 사건이 터졌다. 등굣길에 마주치면 어김없이 뒤따라와 손으로 툭툭 건드리거나 치고 도망가며 장난치던 남자애가 있었다. 하지 말라는 나의 호소를 무시하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날따라 힘 조절에 크게 실패하고 만 그 애의 등을 미는 손, 갑작스러운 압력, 뾰족한 자갈밭, 대처할 겨를 없이 앞으로 고꾸라져버린 나….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 후 고개를 들어보니 돌 위에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를 보는 순간부터 머릿속은 하얘졌고 공포는 물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처럼 퍼져갔다.


“집에 갈래, 집에 갈래!” 울면서 소리치는 나에게 친구는 ‘그래도 학교에 가야지’ 말하며 설득했지만 난 동네가 떠나가라 울며 집을 향해 걸었다. 집에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계셨다. 내 기억에 역대 파출부 아주머니 중 제일 친절하고 자상한 편에 속했다. 집으로 돌아온 날 보고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보며 더 놀랐다. 곧장 나와 함께 근처 병원에 가서 엄마와 통화를 했고, 나는 눈 위쪽을 몇 바늘 꿰맸다. 눈 위에 거즈와 반창고를 붙인 모습의 그 무렵 사진들이 아직 남아있다.

사고 며칠 후 남자애는 부모님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도, 웃음도 사라지고 긴장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 부모님과 남자애 부모님이 대화하는 사이 난 손님들이 선물로 가져온 과자 종합선물세트에 몰입되어 있었다. 한 번씩 사 먹는 과자와 과자 종합선물세트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놀이터와 놀이 공원의 차이랄까? 다친 시간의 공포와 상처는 마음에서 이미 산 넘어 샛길로 사라진 지 오래였으므로, 귀한 선물을 가져온 손님들이 반갑기만 했다. 남자애는 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긴장한 표정과 말투로 내게 사과했다. 어색한 사과받기가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대놓고 기뻐하며 동생들과 과자 파티를 즐겼다. 피로 시작해 과자로 끝난 사건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눈가의 흉터는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두드러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악당도 만만치 않았다. 흰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남자애가 짝꿍이 되더니(이름도 기억난다) 도시락을 이상한 데 숨겨놓질 않나, 지저분한 온갖 행동에 툭툭 때리기까지…, 악당 종합선물세트였다. 당시 방송반에서 반별로 돌아가면서 일기 한 편을 골라 아침 방송 끝 무렵에 읽어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우리 반 차례에 내 일기가 낭독되었다. 첫 문장은 ‘나는 내 짝이 싫다.’이다. 약 50명의 수많은 일기 중 고르고 골라 구태여 그 일기라니. 첫 문장이 조용한 반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내내 박장대소했다. 반면 담임 선생님은 심히 언짢은 얼굴로 듣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이런 일기를 써서 반 망신시켜? 우리 반은 매일 싸우는 반인 줄 알 거 아니야.”

반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분이라 아이들이 대회에서 상을 타오면 무척 좋아하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속상함이 지나간 후 “해산이가 쓴 좋은 독후감 다 놔두고 하필 그걸 읽을 게 뭐람.”이라는 말로 잔잔한 위로를 건넸다. 일기 내용에 짝꿍의 만행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슬프게도 전혀 없었다.

후에 엄마가 내 사정을 선생님에게 전했을 때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게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못살게 굴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어머니가 남학생에게 과자를 주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는 기막힌 내용이었다. 맙소사! 아무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짝꿍의 만행은 다행히 심각해지지는 않았으나 아예 없어지지도 않았다. 짝이 바뀌고 나서야 고생이 끝났다. 악당 짝의 바뀐 여자 짝꿍은 호기롭고 체격이 좋은 아이였고, 단칼에 악당을 제압했다. ‘내가 만만했던 거였구나, 넌.’


5학년, 6학년, 고학년이 될수록 남학생 악당은 눈에 띄게 줄었다. 중학생이 되자 남녀 공학의 남학생들은 여자아이들에게 한층 더 매너 있는 태도를 보였다. 마침내 빌런 남학생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예전에는 급우 간 심한 장난이나 괴롭힘을 아이들끼리 으레 있을 수 있는 다툼 정도로 여겨 가볍게 지나치는 편이었던 것 같다. 다칠 정도의 수준만 아니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하는 쪽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음에도 가벼운 문제로 축소하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시대가 각박한 탓인지 너무 가해자, 피해자 구도로만 몰고 간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가 괴롭혀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선생님이 ○○이한테 얘기할게. ○○이가 괴롭히면 바로 말해주면 좋겠다. 네가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진짜 힘들어서 그런 줄 ○○이는 잘 모를 수도 있거든. ○○이가 단번에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을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선생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꼭 말해줘?”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거부 표현을 어떻게 했는지도 확인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싶다.


악당 노릇을 하는 남자애들은 여러 유형이 있을 것이다.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부적절하게 표현하는 아이,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변 아이들에게 푸는 아이 등등…. 대부분 악의는 없지만 상대에게 상당한 불편감을 준다.

악당 남자애들에게 시달렸던 엄마는 이제 학교에서 악당 노릇을 하는 아들을 보며 세월이 가져다준 반전 앞에 겸허해진다. 훈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양보도 잘하는 성격이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와 본인의 사회성 기술의 발달 속도 사이에 격차가 커 종종 악당이 된다.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상천외한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대부분 악당에게는 적절치 못한 행동에 대해서만 분명하게 교육을 해도 괜찮다. 다른 바람직한 방법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기에. 하지만 훈과 같은 아이는 대체 행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실제 교우 관계 안에서 적용해 보게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긍정적 행동 지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과정이 진득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 현장에 여유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전반적인 인식도, 여유도 부족하기에 아들의 악당 본능이 상향 곡선을 그릴 때마다 방향을 바꾸어 주는 데에 애를 먹었다. 그래도 시간이 쌓이니 잘 설명하면 받아들이고 본인도 노력한다.


훈이 저학년 때였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웃으며 엄마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훈을 보다가 갑자기 배를 후려친 적이 있었다.

“이러니까 애들이 싫어하지!”

그건 내 감정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아이의 행동과 학교 분위기에 대한 답답함, 짜증을 아이에게 쏟아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아이가 벌떡 일어나 눈가가 발개진 채로 등을 곧추세우고 앉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라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손을 잡고, 엄마 좋다고 자꾸 이렇게 만지면 힘들다고 잘 설명해 주고 다른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세상과 아들 사이에서 아들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조율하는 것이 중요 과제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나까지 비장애의 시선에서 아들의 탓을 할 때,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아들과 강원도 바닷가를 바라보며 후회로 남은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훈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기억이 안 난단다. 어쨌거나 엄마가 이러저러했어야 했는데 잘못 행동해서 참 미안했다고 하며 안아주니 훈은 그저 담담했다.


아마 내게 골칫거리였던 옛날 남학생들처럼, 훈도 누군가에게 골칫거리였을 거다. 초등학생 악당들은 지금은 의젓하고 책임감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있겠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장난이 아닌 시의적절한 장난이 무엇인지 깨달아 재밌게 살고 있겠지. 훈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악당이 된다.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악당 남학생을 만나게 되어서 머리가 지끈거릴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다. 고등학생, 20대, 혹은 30대, 내 아들이 악당에서 탈출할 시기가 언제일지 몰라도 기쁨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련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피와 과자를 함께 선물한 녀석도, 천지 모르고 까불다 여걸 짝꿍을 만나 풀이 죽었던 녀석도, 우리 아들도, 소심하고 마음 약했던 초등학생 여자애도, 크느라 고생했다. 다들 수고 많았다.




권고: 심각한 피해가 아니라면, 악당에게도 기회를 줍시다. 나도, 내 가족도 누군가에게 악당이었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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