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통역, 언어 학습, 그리고 문화 식민주의
AI 기술의 발전은 언어의 경계를 허물어 왔다. 특히 번역과 통역의 영역에서,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수준의 자동화와 실시간 처리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인간의 소통 방식과 언어 학습의 동기, 더 나아가 문화 권력의 재편까지 아우르는 깊은 함의를 지닌다.
먼저, 통역의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 변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통역은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문화적 기대를 조율하며,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고 관리하는 행위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뿐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 문화적 함의의 해석, 미묘한 정서와 권력관계의 조정이 요구된다. AI는 이러한 역할 중 일부, 특히 표준화되고 명시적인 정보전달의 영역에서는 이미 인간을 보조하거나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관광 안내나 간단한 비즈니스 미팅 통역 등에서 AI의 활용도는 매우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통역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완전히 계산화하기는 어렵다. 협상 테이블 위에서의 긴장감, 은유와 풍자의 해석, 화자의 의도를 청자의 문화적 프레임에 맞춰 조정하는 일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능력을 요구한다.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며 ‘갭’을 줄여가더라도, 사회적 직관과 의미 협상이라는 인간적 역량은 쉽게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AI 통역은 인간 통역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협업 모델’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AI가 통역의 여러 기능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상황은 언어 학습의 동기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과연 AI가 완벽한 통역을 제공한다면 외국어를 배우지 않게 될까? 도구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전망이다. 내비게이션의 보급으로 지도 읽기 능력이 약화되거나, 계산기의 사용으로 암산 능력이 감소한 것처럼, AI 통역기의 발전은 외국어 학습의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언어 학습은 단순히 정보전달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 사고의 틀을 확장하고 타 문화의 세계관을 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언어는 그 자체로 정체성과 문화적 자산이다. AI가 도구적 필요를 감소시키더라도, 외교관이나 문화 전문가, 학자 등 특정 집단에게는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이 요구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내에서 언어 자본의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AI 통역과 번역 기술의 발전을 단순히 ‘언어 장벽 해소’로만 평가하는 것은 큰 함정을 내포한다. AI는 대부분 영어 중심의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학습되었으며, 비영어권 언어 간 번역조차 영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어의 문법과 사고방식을 세계적 표준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한국어의 존대법이나 정서적 뉘앙스는 영어로 변환되며 손실되거나 단순화되고, 비영어권 간의 문화적 다양성은 영어적 틀 안에서 표준화된다. 결과적으로 AI 번역기는 단순히 영어 중심의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를 기술적 인프라 차원에서 재생산하고 고착화한다.
물론, 세계는 이미 영어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고등교육이 영어로 진행되고, 학술논문과 국제회의, 대중문화에서 영어가 사실상의 표준 언어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AI는 이 구조를 더욱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고착화한다. AI 번역기의 편의성과 비용 효율성은 영어권 자료의 생산과 소비를 더욱 당연하게 만들며, 비영어권 학문어의 쇠퇴를 가속화한다. 이렇게 AI는 단순히 기존의 지배적 구조를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결국 AI 시대의 언어 전략을 논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긴장에 직면한다. 한편으로는 AI 통역과 번역의 편리함과 접근성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술이 언어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위협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AI의 발전은 영어 능력을 한층 더 중요한 ‘자본’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교육적·사회적·문화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AI 통역과 번역 기술을 설계하고 규제하는 방식은 언어 권력의 재편과 문화적 자율성의 보존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다언어주의적 AI 설계와 비영어권 언어자원의 보호, 공정한 데이터 구축 등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선택의 문제다. AI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편의를 약속하지만, 동시에 사고와 문화의 경계를 재편하는 새로운 식민주의적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다. 기술이 열어주는 가능성과 함께 그로 인한 긴장과 책임을 성찰하는 일이야말로, AI 시대 언어와 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