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쓰기 사회: 일본이 변하지 않는 방식

일본은 “변하되, 변하지 않는” 패턴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by 우주사슴

도쿄의 아침 지하철. 정장 차림의 직장인이 아사히신문을 펼쳐 든다. 신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며, 세로로 배열된 활자를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옆자리 대학생은 스마트폰으로 가로쓰기 뉴스를 읽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대의 정보 소비 방식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이 단순한 습관 속에서, 일본 사회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독특한 리듬이 엿보인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신문, 마이니치 신문, 중도적 성향이다.
천년의 관성이 만든 미학


일본의 세로쓰기는 단순한 기록 방식이 아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를 기반으로, 붓과 종이의 특성과 맞물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족자나 병풍 같은 전통 매체에서 세로쓰기는 시각적 질서를 창조했고, 신문과 공문서에서는 권위와 격식을 상징했다. 오늘날에도 문학 작품과 주요 신문에서 세로쓰기가 남아 있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전통적 리듬과 미적 감각을 유지하려는 의도적 선택이다.


일본 근대문학의 명작, 나츠메소세키, 봇짱 (도련님), 1906


다른 나라들은 왜 빨랐을까


한국과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를 선택하며 기존 관습을 단절했다. 효율성과 국제 표준을 중시한 결정이었다. 한국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문은 세로쓰기에 여러가지 한자가 섞여있었지만, 중반 이후 가로쓰기와 한글 표기로 통일되었다.


독일 통일전 1989년으로 추정된다.


서구 국가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법, 교육, 기업 구조를 단절적으로 개편하며 전통적 관행을 박물관 속으로 보냈다. 반면 일본은 세로쓰기뿐 아니라 기업 문화, 정치 제도, 사회 정책까지 전통과 현대가 나란히 걸어가는 ‘병존 전략’을 유지했다.


메이와쿠 문화가 만든 안전판


이 차이는 일본 사회 깊숙한 곳에 있는 ‘메이와쿠(迷惑)’ 문화에서 설명할 수 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윤리적 기준과, 실패 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적 태도가 결합해 있다. 결과적으로 급진적 변화는 자연스럽게 점진적 조정으로 제한된다. “기존 방식을 완전히 바꿔보자”라는 제안이 나오면,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이러한 사회적 안전판이 병존 구조를 강화하는 핵심 장치다.


섬나라인 지리적 조건과 중앙집권적 관료제, 지역 균형 구조, 집단 조화를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까지 겹치며, 일본만의 느리지만 안정적인 변화 리듬이 만들어졌다.


급진적 변화도 결국은 병존으로


메이지유신은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 중 하나였다. 봉건제를 근대 국가로 단기간에 바꾸고 서양식 제도와 기술을 도입했지만, 동시에 천황제를 강화하고 무사 계급을 관료와 군인으로 재편했다. 혁명처럼 보였지만, 전통적 요소를 새로운 시스템 안에 녹여낸 병존 전략이었다.


패전 후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식 민주주의와 농지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천황제는 상징적 형태로 남았다. 기업 경영에서 미국식 기법을 도입하면서도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병행했다. 단절처럼 보이는 변화 속에서도 기존 질서가 포섭되고 있었다.


현재진행형인 병존의 풍경


오늘날 일본 기업에서도 이 패턴이 뚜렷하다. 1990년대 구조조정을 거쳤음에도 대기업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유지한다. 일부 IT·스타트업 기업에서 수평적 조직 문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전체 그림에서 보면 여전히 전통적 관행이 주류다.


정치도 비슷하다. 자민당 장기 집권과 중의원 선거 구조로 인해 정권 교체가 제한적이며, 개혁은 점진적 조정 수준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연금과 이민 정책도 기존 제도와 병존하며 단계적으로 시행된다.


젊은 세대, 그들만의 반란


그럼에도 변화의 징후는 존재한다. 젊은 세대는 전통적 기업 문화와 집단 중심 가치에 점점 거부감을 보인다. “회사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논리에 의문을 품고, 일과 삶의 균형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중시한다. 디지털 전환, 재택근무 보편화, 외국인 노동자 증가, 스타트업 중심 문화도 기존 구조와 공존하며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밖에서 밀어붙이는 압력들


국제 환경은 일본의 느린 변화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미중 갈등, 기술 패권 경쟁, 글로벌 산업 경쟁은 점진적 조정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반도체, 배터리, AI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신속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일본은 외부 압력에도 기존 구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병존과 적응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요미우리 신문, 보수적 성향이다.
변하되, 변하지 않는 나라


결국 일본 사회는 앞으로도 “변하되, 변하지 않는” 패턴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도쿄 지하철에서 세로쓰기 신문과 가로쓰기 스마트폰이 공존하듯, 전통과 혁신도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안정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지만, 글로벌 속도전에서는 제약으로 작용한다. 메이와쿠 문화와 책임 회피 태도는 이런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사회적 장치다.


세로쓰기라는 작은 문화 현상에서 시작해 일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변화의 리듬을 읽어봤다. 외부 압력, 세대 교체, 기술 혁신 속에서 일본이 병존 패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혹은 단절적 혁신을 선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답은 도쿄 지하철에서 세로쓰기 신문을 읽는 마지막 세대가 사라질 때쯤, 비로소 명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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