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우리는 제거 될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가"
너무 당연해서 의심되지 않는 명제입니다
“자연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용됩니다.
환경 담론과 윤리 교육, 다큐멘터리의 서사와 광고의 감성적 언어 속에서 자연은 이미 도덕적 우위를 점한 존재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보호받아야 하고, 인간은 반성해야 하며, 사랑은 그 둘을 매개하는 올바른 감정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위에 가깝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구조입니다. 이미 자연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선하고, 조화롭고,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질문을 바꿔봅시다.
"자연은 정말 조화로운 존재인가"
우리는 자연을 조화롭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정화하고, 균형을 이루며, 결국에는 안정으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긴 시간의 과정 속에는 드러나지 않는 제거가 있고 도태가 있으며 붕괴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안정된 구조만이 남습니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은 ‘최초의 혹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과한 결과물입니다. 수없이 실패한 구조, 유지되지 못한 생태, 소멸한 종의 흔적 위에 남은 잔존물입니다.
자연은 조화롭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화롭지 못한 것은 오래 존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전환은 자연을 미화하는 언어를 벗겨냅니다. 결과를 우리는 조화롭다라고 느끼는 것이죠.
우리는 자연이 스스로를 정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화라는 표현은 의도성과 도덕성을 암시합니다. 더러워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처럼 들립니다.
현실적으로는 자연은 회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속 불가능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수준이 한계를 넘으면 생태계는 붕괴하고, 조건이 바뀌면 종과 생명은 사라집니다. 그 과정은 처벌이 아니라 결과일 것입니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말은 의인화를 동반합니다. 동시에 신격화, 감정 투사, 위안의 대상화가 뒤따릅니다. 사랑은 인간 내부의 정서 혹은 감정일 뿐, 자연의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과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때 구조적 문제는 감정의 문제로 치환됩니다.
인류가 구축한 소비와 생산의 시스템, 에너지 사용의 방식, 경제적 인센티브의 설계가 아니라 개인의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환원됩니다.
사랑의 마음가짐은 따뜻하지만 방향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마음가짐 아래 도덕적 면죄부로 작동합니다.
일회용을 대량으로 소비하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않는다라고 믿는 사람
친환경 선택하나로 다른 선택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산의 풍경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비법정 탐방로로 오르는 사람
수거된 의류를 재활용한다고 모으지만, 그 옷이 필요없는 제3세계로 보내는 기업
ESG 관련 정책을 홍보하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지만, 실제로 온실가스에 대한 대책은 없는 기업 등
"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자연을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적 객체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자연은 우리를 벌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습니다. 조건을 넘는 순간 유지되지 않을 뿐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모든 시스템은 비슷한 원리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냉혹해 보이지만 동시에 명확합니다. 책임을 감정에 기대지 않고 조건과 한계의 초점으로 옮깁니다.
"인간은 원합니다. 자연과의 공생"
인간이 만들어 온 사회, 경제, 국가 등 시스템 또한 자연 안의 하나의 구조입니다.
인간은 조건을 넘는 상태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일정 기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불안정성을 기술과 제도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미 조건을 넘은채 연장하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장은 연장일뿐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사회의 제거는 자연의 처벌이 아니라 조건을 넘은 결과입니다.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차갑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치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결과물이 자연이 수용가능한 범위를 넘어서고 있지는 않는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