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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여자들 Dec 17. 2020

계란 프라이

글쓰는여자_푸른산

소녀가 달려간다.  

대문을 나서 마을의 광장까지, 광장을 지나 전신주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를 세고 나면 동구 밖이다. 여기서부터는 저 멀리 신작로의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아직 반이 남았다. 소녀는 오른쪽 손목의 시계를 보고 다음 버스를 가늠해 본다. 봉동을 거쳐 전주로 가는 버스는 20분 간격으로 배차시간을 두고 있지만, 시골버스라 그런지 엿장수 마음이다.  


뛰어야 할지, 뛰다 걷기를 반복할지, 천천히 걸을지 여기쯤에서 결정하면 된다.  

동구 밖을 지나면 강줄기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듯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두 개의 수문을 지나고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면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오르막길의 끝, 늙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 자그마한 점방이 있다. 점방을 지나 신작로에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 달음이면 충분하다.  정류장이랄 것도 없다. 길게 뻗는 신작로 위에 덩그러니 쇠 표지판 하나가 서 있는 그 아래가 버스를 타는 곳이다.  


소녀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부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봉동읍내로 가야 했던 중학교 3년을 빼고, 26살 처음 중고차를 사서 운전하기 전까지 내내 이 길을 걸었다. 장날 엄마가 사다준 검정고무신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그녀는 이 길을 걸었다. 뽀얗게 흙먼지가 신발 위에 앉아도, 비가 오는 날이면 요리조리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동무들과 함께 걸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아버지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이 길을 달렸다. 그럴 때면 강바람이 자전거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소녀는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다. 우등생도 취준생도 아니었지만 늘 잠이 부족했다. 

나이 들면 잠도 없어진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오십이 내일모레인 나는 지금도 아침잠이 많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학년이 오르면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까지 하고 나면 집에 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시내에서 자취를 하면 좋았겠지만 1시간이 넘는 거리를 3년 내내 통학을 했다. 소녀는 아침에는 첫차를 타고, 저녁에는 막차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에 가는 버스노선이 적어 버스를 놓치면 시내에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소녀가 타야 하는 버스는 6시 20분 아침 버스였다.  


5시가 조금 넘으면 그녀가 딸을 깨우기 시작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엌을 나서 마루를 오르고 문지방을 넘는다. 눈꺼풀이 물 젖은 솜 자루 같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최전선에서 소녀는 잠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킨다. 버스를 타려면 적어도 30분 전에 집을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버스를 놓치거나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내내 눈도 깜박이지 않고, 100m 달리기를 해야 한다. 소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교에 가야 하고, 버스를 타야 했다!  

소녀는 아침에 일어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책가방을 챙기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먹어야 할 도시락 2개도 가방에 야무지게 넣는다.  


“엄마! 오늘 도시락 반찬이 뭐야? 새는 것 아니지?”

“새는 거면 비닐에 한번 넣어야 하는데~”

“밥 좀 꾹-꾹- 눌러 싸지마!”


그녀는 매번 밥 한술 뜨지 못하고 학교에 가는 어린 딸이 안쓰럽다. 큰 자식, 작은 자식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공부를 한지 오래다.  늦둥이로 나아 품 안에 두고 보는 철없는 막내딸이라 그런지, 세상이 흉흉해서인지 걱정이 되고 안쓰럽기만 하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막내딸의 손에 그녀는 종이에 싼 무언가를 건넨다. 익숙한 듯 소녀는 그것을 받아 든다. 소녀의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계란 프라이다.


마을은 치마처럼 펼쳐진 산자락 밑으로 소쿠리 모양을 하고 있다. 오봉산 계곡과 마을 위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한가운데로 길게 흐른다. 이 실개천을 따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빨래터가 있다. 마을로 들어오고 나가는 큰길은 두 개, 두 개의 길을 따라 각각 걷다 보면 큰 냇가와 마주한다. 만경강 상류다.


마을 안의 집 위치에 따라 마을은 크게 3곳으로 나누어 부른다. 중앙으로 흐르는 실개천과 광장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누어 윗뜸, 아래뜸, 건너뜸으로 부른다. 소녀가 사는 곳은 윗뜸이고, 소녀의 집은 윗뜸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에 있다.  


소녀는 집을 나서 광장까지 난 내리막길을 단숨에 내달린다. 

경로당을 지나 마을광장을 벗어나면 동네 사람들과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다. 소녀는 그제야 그녀가 건넨 계란 프라이를 한입 베어 문다. 동구 밖까지 일직선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따라 소녀가 ‘오물오물’ 장단을 맞춰 맛있게 걷는다. 코끝으로는 들기름 향이 혀끝에서는 고소한 계란 맛과 달 큰 한 야채 맛이 입안 가득 느껴진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녀의 계란 프라이는 맛도 모양도 조금씩 달랐다. 어느 때는 당근과 파가 들어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계란말이가, 어느 때는 소금 간을 약간 한 동그란 모양의 담백한 계란 프라이가 종이에 쌓여있었다. 소녀는 그때그때 다른 야채들이 들어가 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계란 프라이가 더 맛있다고 생각했다. 들기름을 약간 두르고 뭉근하게 익혀낸 계란말이는 그렇게 소녀의 든든한 아침밥이 되었다. 


해 질 녘 텃밭의 어린 상추를 솎아 저녁을 준비한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상추를 듬뿍 넣어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다. 흐르는 물에 상추를 씻어 소쿠리에 물기를 빼고, 고기를 먹지 않은 엄마를 생각하며 팬에 들기름을 적당히 둘러 계란 프라이를 한다. 은근한 불에서 동그란 계란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노른자는 살짝만 익힌다. 

그릇에 상추, 오이, 콩나물, 볶은 애호박, 버섯을 돌려 담고 가운데에 계란 프라이를 얹는다. 오늘도 밥보다 야채를 더 많은 비빔밥이다. 빡빡 된장과 맛 간장을 넣은 고추장을 얹고 방금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넣어 비빈다. 


'쓱싹- 쓱싹-, 쓱싹-쓱싹-'


봄 상추를 심고 상추 대가 올라오는 초여름까지 일주일이면 서너 번, 엄마는 질리지도 않는지 상추 넣고 비빈 이 밥을 타박 한번 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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