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 거북선 길에서 만난 사람들
세운상가는 나에게 고향 같은 곳이다.
전자공학을 배우며 전자부품과 컴퓨터 부품을 사러 왔던 세운상가는 모두에게 추억이 깊은 곳이다.
1968년 세워진 세운상가는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약 1킬로미터에 걸쳐 형성된 7개의 건물은 한창 개발독재 시기 만들어졌지만 어쩌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이 건물이 만들어지던 시대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시기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많은 농업인구가 산업인구로 유입되면서 임시 주거형태가 많아졌다.
즉 청계천과 충무로 일대는 판자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서울이 미관상 보기 좋지 않게 여긴 박정희 정권은 판자촌을 철거하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곳이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및 광주시 남한 산성면 일대다. 이후 성남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이어진 비극의 역사가 있어왔다.
또한 그 당시 서울 내에 일자리가 있어 성남까지 이주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강북구 삼양동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현재도 강북구 삼양동은 대표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배경에는 과거 강제 이주지라는 꼬리표와 함께 80년대 중국으로 경공업이 이전하게 됨에 따라 가내수공업산업이 무너지게 되어 활력을 잃은 대표적 고령화된 지역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또다시 과거와 같은 강제적 개발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 - 충무로 지역에서는 소상공인 및 소매,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반발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층들이 모여서 청계천 을지로 보존 연대가 설립되어 활동 중에 있다.
얼마 전 세운상가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초고층 빌딩 단지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은 세운상가 주변의 오래된 기계부품 및 원자재 판매 가계는 우리 삶의 뼈대와도 같은 곳으로 이곳에 임대를 통해 자리 잡은 상인들은 자신의 생업을 접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고 박원순 시장은 도시재생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상가를 리모델링하고 상가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로 박원순 시장 시절인 2014년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면서 이 건물들을 공중과 지하로 잇는 공사로서 2017년 보행 재생 1단계 구간인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와 을지로 지하도가 이어지며 공중 보행로로 연결되었다.
현재는 모두 완공되었지만 오세훈 시장은 도시재생 업적 지우기를 시작하고 있어 보인다. 개통이 완료되었음에도 활성화에 힘을 쓰지 않아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 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 과거 민들레영토 대표님이신 지승룡 대표님으로 지승룡 대표님은 현재는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며 서울 충무로 일대의 근현대 역사적 가치를 찾아내고 있다.
거북선 길은 충무공 이순신 생가 근처 세운상가부터 대림상가에 이르는 공중 보행로에 과거 민들레영토 대표였던 지승룡 대표가 붙인 이름이다.
김춘수 시인 꽃의 문구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처럼 지승룡 대표님이 명명한 거북선 길이라는 길 이름으로 우리는 이 지역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고 거리를 거닐면서 도시의 가치를 알게 된다.
또한 그런 가치가 더욱 커지게 될 때 자본이 함부로 도시를 삼키지 못하게 될것이다.
우리는 충무로에서 종로로 연결되는 길을 걸으면서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곳을 지나면서 개혁성향 남인들의 삶과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개발독재시대 역사에 이르는 역사 맥락을 알게 된다. 종로와 충무로 일대를 연결하는 거북선 길은 전임 박원순 시장이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완성된 곳이다 보니 전임 시장 흔적 지우려는 현 오세훈 시장은 대규모 고층건물단지로 개발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어 세운상가를 지키던 많은 소상공인들과 새로 터전을 만들려는 젊은이들의 미래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사라질지 모르는 거북선 길 산업생태계에 이름과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우리는 자본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공간과 역사, 그리고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문화 파괴 자본에 대해 감시의 눈을 가지게 된다. 거북선 길 주변 활동가와 젊은 예술인들에게 응원을 보내고자 합니다.
얼마 전 고 박원순 시장 때 시작된 다시 세운 프로젝트 공중 보행길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 공중 보행길은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를 공중 보행로 이곳에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산업생태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젊음이 만나게 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이다. 이미 을지로에 힙지로 등 새로운 인스타그램 명소가 나타나고 있고 젊은이들의 왕래가 많아지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은 초고층 단지로 개발을 천명하며 이곳을 지키던 오래된 산업 생태계는 무너지게 될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공중 보행길의 완성은 사실 이곳 활성화를 위해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지만 부동산 개발 자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개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기획자이자 전 민들레영토를 운영하던 지승룡 대표는 이곳을 거북선 길이라고 명명(이순신 생가터에 위치, 충무로 등 복합적 의미)하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이곳에 대한 걷기 인문학 코스를 개발했다.
걷기 코스의 시작은 충무로역 대한극장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맞은편의 상가 건물에서 보이는 세월을 느끼면서 서울의 유래를 들어 본다. 한참 산업화 시절 서울의 노동인력이 와서 판자촌은 지었던 지역이던 충무로와 그들을 성남과 삼양동으로 내보내던 개발독재시대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해방 후 영락교회와 서북청년단들이 명동에 자리 잡은 이야기와 한국사회 탐욕스러운 자본의 형성 이야기등 너무나 많은 이야기 꺼리가 있다.
좀 더 과거로 가면 충무로와 일본인들의 마을 이야기에 대해 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생가터를 보게 되고 이 당시 국제정세에 밝은 남인들의 개혁성향까지 알고 나면서 거북선 길에 대해 이름 짓게 된 사연을 들어 보게 된다.
또한, 세운상가에 이르러서는 한국사회 산업을 이루어온 풀뿌리 같은 작은 도시 공장의 흔적을 고층건물의 탐욕으로 덮어버리려는 자본의 야만성을 우리는 보게 된다. 또한 오래된 건물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페미니즘 카페 활동가 사장님 그리고 진양상가의 예술인, 힙지로의 젊은 사업가 등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탐욕의 빌딩이 아닌 가치와 예술로 세상을 꾸미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곳 상가를 연결하는 역사적 해석을 통해 붙인 길이름으로 거북선 길로 명명하고 길을 따라다녀보고자 했다. 먼저 대한극장에서 바라보는 진양 꽃상가와 충무로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는 산업화 시대 서울의 모습을 알게 된다.
대한극장 주변 뉴스타파 건물이 있다. 죽은 언론의 시대에 시민의 자본으로만 운용하는 뉴스타파는 오늘날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언론사가 있다면 길 건너 맞은편 상가 앞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항쟁의 역사가 남아있다. 바닥에 김귀정 열사의 사망 현장에는 그 치열하던 민주화 시위 중 한 여린 여학생이 경찰 과잉 진압으로 숨진현장이 있다. 그는 김귀정 열사가 사망했던 자리를 뒤로하면서 우리는 진양상가를 마주한다. 이 상가로 연결되는 다리를 통해 세운상가까지 연결이 된다.
이지역의 퇴계로를 중심으로 서해길이라는 곳이 있고, 인쇄골목 사이에 이순신장군 생가터가 있다. 길 이름에서 알수 있듯 퇴계 이황과 서해 류성용과 이순신은 남인이라고 한다. 이당시 남인들은 통역을 하는 일을 하면서 세계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포루투칼 함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순신의 철갑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우리 실력을 키어온 남인들은 아쉽게도 조선의 주류세력이 되지 못해서 청개천 남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런 안타까움은 현재도 이어진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 칭송을 하면서도 어디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지 잘 모른다. 이순신장군은 서울 충무로 일대, 현재 확인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신도빌딩으로 제대로 된 기념물 조차 없다. 마찬가지로 세종대왕 나신 곳에도 제대로 된 상징물조차 없다.
일제강점기가 되어서도 사실 기득권이 아닌 남인 지역은 일본인들이 자리잡은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거리를 혼마치라고 불리게 되었고 중심가도는 연결되어 좁고 여러갈래로 나뉘어 졌다.
그당시 건물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불이 더이상 나지 않도록 하는 빈공터가 있었는데, 그터가 바로 진양상가 가 위치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진양 꽃상가 한편에는 미술전시관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일에서 활동하던 두 분 작가를 만나게 된다. 또한 작은 골목에는 페미니즘 카페 활동가 및 이곳을 토대로 새롭게 가계를 시작한 젊은 창업가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폐허처럼 보이는 이곳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이곳의 개발방식이 과연 고층건물 아파트를 짓는 것이 유일한 개발인지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골목길 속 문화를 통해 찾아내는 작업이 우리 사회에 없었던 것은 유감이지만 현재 이러한 문화 발굴을 통해 문화의 가치가 돈의 가치보다 큰 것을 인정받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멋진 사회가 된다.
그것이 빈부 격차를 줄이고 모든 계층이 함께 살 수 있는 포용 도시를 만들게 된다.
새로운 젊음 거리
세운상가 일대는 현대상가(현재는 철거됨), 세운상가 가동,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8개 상가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상가건물의 명칭에도 불구하고 연결된 건물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또한, 건물 주변에는 소규모 제조업체들, 금속 조립, 전기 전자, 인쇄업, 건설 기자재, 조명 등 다양한 업종의 건물들이 세운상가 건물군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는데, 이러한 주변부까지 통칭해서 '세운상가'로 통칭할 만큼 이 지역은 '세운상가'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이러한 형상과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 것은 서울의 도시화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통사회에서는 국가적 제의 공간인 종묘한 인접한 지역이었으며, 식민지 전반기까지는 각종 상가와 제조업, 일부 주거지와 공공시설이 입지한 장소였습니다. 현재 세운상가라는 물리적인 형태들이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구조는 식민 말기 전쟁으로 조성된 소개 도로 건설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습니다. 식민 정부에 의해 강제로 소개(疏開) 되어 '거대한 공지'로 남았던 공간이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국유지로 편입되고, 이곳에 피난민들의 판잣집이 가득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소개공지대는 이후 민간에 불하되어 사용되다가 결국 1966년 서울의 대개조 프로젝트의 시범으로서 세운상가가 생성되었으며, 상가 주변은 점점 다양한 업종들이 집적하게 되면서 복잡하게 얽혀 현재의 경관을 만들어 냈습니다. -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New/NR_archiveList.do?ctgryId=CTGRY554&type=A
이러한 실천으로 2022년 10월 22일 세운 거북선길 산책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민들레 영토 지승룡대표는 이지역의 역사에 대해 해설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거리의 역사를 알려 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곳 거북선길을 방문하고 한번씩 관심가지며 이길에서 만난 작은 가계에서 음료라도 소비할때 이들에게 힘이 될것이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