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불완전한 근대성 반성
서구사회에서 근대라는 시기는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 산업혁명과 이후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성장을 가져오면서 문화와 시민성에 대한 철학이 싹트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앞서있는 기술과 문화로 무장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당한 이후 이슬람에 대한 자격지심을 극복한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침략자본이 형성된 시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후 1차,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 패권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 역시 그 시기에 동학과 같은 민중 스스로 깨우친 근대화 혁명이 있었지만 집권층은 우리 스스로 자라나는 근대화싹을 외세 무력으로 억누르고 외세에 의존해서 자리를 보전하여 식민지에 협력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우리 관점이 아닌 식민지 침략자 관점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일본자금은 여전히 한국사회 친일 지식인그룹을 지원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국사회 스스로 보수라 고하는 사람들은 정통적이고 사전적 의미의 보수와 다른 성격이다. 그들은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계층으로 식민지 보수라고 별도로 정의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고 봐야 한다. 왜곡된 근대화 과정은 주로 자본형성과 함께 지배구조왜곡의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사회 근대화에 대한 왜곡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중들의 순응은 전체주의를 만드는 자양분이다.
물론 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역사적으로나 순응하는 민족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험한 식민지 경험은 전체주의 성향과 조직에 대한 순응을 강요한다.
전체주의 특성은 억압과 착취를 위해 순응하는 대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 프로파간다와 폭력성을 가지는 것이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러한 특징을 이루는 언론과 검찰권력 유착으로 이러한 전체주의 특성이 권력층과 대중들을 순응하게 만든다.
사실 전체주의에 길들여진 대중들은 자신들의 순응하는 태도로 인해 스스로 받는 불이익을 생각 못한다.
순응은 습관이 되고 그들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순응의 또 다른 특징은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미디어를 신뢰하고 직위에 의해 규정된 권위에 따르고 복종하기 쉽다. 비판 없는 믿음과 권위에 대한 복종은 당신 뜻이 아닌 남의 뜻에 따라 살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 정치현상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왜 민주주의 퇴행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 이유는 고착화된 권력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착화된 권력은 오랫동안 기득권을 이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최근 겪는 현상을 통해 이런 전체적 맥락을 볼 수 있다.
몇 변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국제관계에서 국민의힘과 같은 식민지 보수정권만 들어서면 식민지 국가처럼 되돌아가면서 자국이익이 아닌 과거 식민 지배국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들어 주는 필터를 벗겨내야만 볼 수 있다.
본질적 실체를 알았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더 이상한 건 북한간첩은 많지만 미국, 일본, 중국에 대한 간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세상은 우리 상식과 달리 국가 간 치열한 정보전과 함께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욕구가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는 식민지를 겪었던 국가에는 분명 식민지 조력자들이 있어 왔다.
많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대부분 국가는 역사 청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한국사회는 그렇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한국사회 기득권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득권 정치집단이 가진 속성이 식민지성과 전체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모두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서 만들어진 구조와 관념이 현재까지 연장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식민지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적이 필요하고 그것은 북한이 된다.
즉 본질적으로 남과 북 갈등은 우리 의지가 아닌 주변국 또는 과거 식민 지배국(과거 일제)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국가에서 식민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체주의가 유리하다.
전체주의와 종교는 별개로 보이지만 종교는 전체주의 특성을 가진다. 종교는 대중들을 순응하도록 만들기 쉬운데, 이런 특징을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용해 온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일 먼저 종교부터 침투하는 전략을 짠다.
아프리카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 대부분 기독교가 확산되어 있고, 식민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경우도 예외가 없이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과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미국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전략 속에는 미국이 일본에게 조선의 지배권을 주는 대신 미국 기독교는 조선 내 포교가 가능했다.
따라서, 한국사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는 미국으로부터 온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온 기독교는 대한제국왕실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언더우드는 연희전문 전신을 세우고 그의 제자인 여운형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함께 3.1 혁명을 주동하였다. 또한, 헐버트와 같은 분은 한글운동을 지원하였고 우리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기독교와 달리 미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미군정 시대 점령군 자격으로 온 미국 기독교에 의한 학살은 우리 한국사회에 큰 비극으로 남아있다.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다. 영락교회 청년들이 제주에서 벌인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단죄받지 못했다.
기독교는 한국사에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초기 선교사의 열정으로 우리 문화와 독립의지를 키웠었다. 문화적으로 미국의 개척정신과 독립정신, 미국에서 시작한 민주주의가 우리 한국사회 동학과 결합하여 3.1 혁명과 같은 폭발적 시민정신과 임시정부 태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정적 측면은 상당수 교인들이 친일파에서 친미파로서 전환하게 했고 비판의식을 없애버려 한국사회 전 근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유지하게 했다. 또한, 식민지 나누고 분리하고 통치하기 좋은 수단으로 역할을 했다.
개신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 토속 무속과 결합되어 새로운 사이비 종교까지 영향력이 높아져 왔다. 최근에는 보수개신교, 통일교, 신천지와 같은 종교와 무속종교들이 특정 정치세력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권력에 종교가 종속되는 전통은 어쩌면 과거 일제강점기 기독교의 특성을 이어왔던 것 인지 모른다. 그 시절 보수 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에 복종하여 신사참배를 했다. 따라서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들과 종교인은 서로 필요성으로 공생을 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사회 정치인들은 종교에 대해 쓴소리를 못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제공하는 조직력 때문이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순응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종교집단 지도자들은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집단의 힘을 통해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더욱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네플릭스 “나는 신이다”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면서 인간 집단에서 나타나는 흔한 오류 이야기다.
종교가 성장하는 동력은 인간 내면 근본적 두려움, 권위에 복종하는 습성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가 만드는 무비판성은 전체주의 성향 집단을 만들어 낸다.
JMS종교를 만든 정명석은 무학으로 대학생들을 움직였다.
여기서 JMS종교에 빠지는 엘리트들은 어떻게 무학인데 이렇게 대단한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런 오류의 원인은 대중들이 학벌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학벌로 느끼는 격차와 달리 인간 능력차이는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사람들은 왜곡되도록 착각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과신으로 인해 JMS종교에 접근했던 엘리트에 가까운 사람들과 그런 엘리트를 따라 안심하고 찾아온 신도들에 의해 JMS는 성장했다고 한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학벌 좋은 이웃들을 보고 비극에 빠져든다.
이러한 현상은 왜곡된 권위에 대한 신봉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대학생들은 젊고 똑똑해 보이는 대학생 신도들이 많아 보여 JMS교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이유는 이들이 모든 사회에 퍼져있어 유명인을 추종하고 신뢰하는 집단이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여 지속된다.
이러한 사이비 집단과 한국사회 일반 종교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많은 대중들은 자신을 위한 선거가 아닌 기득권을 위한 선거를 한다. 선거가 되면 이런 사이비교에 찾아오는 정치인은 이런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정치인들은 맹목적인 신도들의 도움으로 표를 모아간다.
정치권에 신도 동원력으로 성공한 대표적 목사로 전광훈 목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여신도에게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빤스목사로 알려졌지만 신도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그를 따른다.
얼마 전 3.1절 일장기를 자기 집에 내건 목사도 신도가 따르는 것을 보면 목사들이 어떤 개소리를 해도 신도는 그를 따른다는 것이 현실이다. 전광훈 목사는 신도 동원능력으로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이유도 신도들의 절대적 믿음이라는 용어에 의한 무비판성 때문이다.
한국사회 종교 현상을 잘 다룬 네플리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는 종교인들의 무비판성과 권위에 복종하는 현실을 보여줬다. 따라서 우리 깨어있는 시민들은 비판의식을 가지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근대성을 갖추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 근대는 개인이 성립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집단이 아닌 개인성이 나타나는 것이 근대성의 시작이다. 한국사회는 식민지로 인해 개인성이 말살되어 살다, 해방 후 역시 친일기득권에 의해 억눌려 살아왔다.
그나마 대중들이 숨실 곳을 찾아 종교를 가지게 되었겠지만 종교 역시 전체주의적 특징과 맹목적 믿음을 강조해서 우민화를 시켜왔다. 그러나 한국사회 대중들에게 근대성을 찾아주게 된 흐름은 정보통신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 근대성은 개인스스로 가치를 찾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소통하여 스스로 권리를 당당히 요구할 줄 아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을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근대 이전사회인 전근대시대로 후퇴하기를 바라게 된다.
오늘날 왜 한국사회 기득권들이 전근대적 가치관이 나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성공이 그들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에 미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합리성이 아닌 미신에 의존하는 기득권들은 한 번도 스스로 정당하게 자신의 힘으로 정상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1951년 출간된 한나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맹종이 전체주의를 불러온다고 했다. 한국사회 대중들은 여전히 전근대에 살고 있다.
늦었지만 맹종이 아닌 개인의 대한 비판적 사고와 토론을 기반으로 시민이 정치에 직접참여를 통해 우리는 되살아나는 전체주의 망령과 싸우고 극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