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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7. 2023
빌어라 아빌라
18세기 조선 후기, 성군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살아생전 못다 한 효심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수원의 화성은 이 배경 속에 탄생합니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산 백성을 쫓아낼 수는 없는 터라, 정조는 이주 장소를 준비시켜 놓고 가옥 건축비에 이사비용까지 넉넉히 주어 사람들을 새 마을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마을이 지금의 수원이 되었고요. 조선 최초의 신도시 수원의 개발붐을 이어받아 그 전체를 방어하는 화성까지 등장합니다. 수원과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됩니다. 지금은 수원화성 문화제로까지 이어져 탄탄한 지역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요한 은자의 나라 동방의 조선에서 수원화성의 축조에 훨씬 앞선 11세기 서방 끝, 수다스러운 기사의 나라 에스파냐 왕국, 거기서 통일 전 왕국의 모태가 되는 카스티야와 레온 자치지방에선 이슬람교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거대한 성벽을 짓습니다.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그때, 성벽을 잘 세워 방어한 곳이 바로 이곳 아빌라입니다.
아빌라의 정식 이름은 Ávila del Rey, 또는 Ávila de Los Caballeros로 왕의 아빌라와 기사의 아빌라 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도시에 들어서기 전부터 길이 2.5km, 높이 12m의 긴 성벽이 눈에 들어옵니다. 11세기의 로마식 성벽인데, 보존상태가 상당히 잘 되어 있어 1985년 중세 성벽을 포함한 시가지 자체와 내부 성당들이 대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려졌습니다.
주위를 보면 그저 목장과 밀밭뿐이라 한적한 시골인데, 유수의 문화유산을 보유한 동네라 하니 괜스레 샘이 납니다. 어수룩한 옷차림과 손때 묻은 지팡이를 집은 마을 어르신이 본인 고향에 대한 자부심으로 외지인인 저에게 말을 겁니다.
처음에는 묵묵히 듣다가 이내 우리가 외침만 좀 적었더라면, 아니면 목재 대신 석재로 건물을 올렸더라면 면적은 작지만 엄청난 문화재 보유국에, 며칠 밤을 새도 끝없는 이야기가 흐르는 전통적인 문화 강국이 되었을 거라며 뇌피셜을 피력하려다 혀끝에 알싸하게 남고 맙니다. 제아무리 고향을 떠나 오래 나와도 역시나 그 속에선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장이었어요.
아빌라는 단순히 외양의 성벽만으로 유명한 곳은 아닙니다. 이곳은 노래와 성자의 도시 (Ciudad de Cantos y de Santos)라는 별칭이 있어요. 이베리아 반도의 흔한 시골 풍경인데도 그런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빌라는 중세 당시 음유시인의 시적 상상을 자극해 중세 기사의 기개와 사랑의 샘이 되는 한편, 쉼 없는 전투 속에 불안한 삶으로부터 절대자를 찾아 신의 뜻을 탐색하던 수도자들의 쉼터가 되어준 곳이기도 합니다.
하여 기독교 순례자에게 이곳은 카르멜 수녀회의 대표인물인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대 테레사 또는 예수의 테레사)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2살에 어머니를 여읜 테레사는 성모님에게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습니다. 19살 나이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빌라의 강생 카르멜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이후 내적 수양을 쌓고자 홀로 기도와 독서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신비스러운 체험과 환시를 자주 경험합니다. 비신자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요.
대표적인 일이 기도하던 중 불로 만든 창을 가진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가슴을 찔렀는데 그 일로 그의 심장엔 성흔이 생긴 사건입니다. 이를 두고 성녀 테레사의 상징은 주로 불화살에 찔린 심장 또는 찔린 중에 환희의 표정을 짓고 있는 수녀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