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작지만 큰 마을, 알바 데 또르메스

by 이루나

살라망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마을 알바 데 또르메스(Alba de Tormes)가 있다. 인구 5천 명 남짓의 시골마을인 이곳은 빠르게 보자면 반나절이면 마을 전체를 둘러보고도 남을 작은 곳이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 어떤 대도시보다도 거룩한 기쁨을 선사하는, 말 그대로 작지만 큰 마을이다.


벌써 10년도 더 전에 얼떨결에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심이랄 게 딱히 없었기에 살라망카를 그토록 자주 오면서 지척에 두고도 몰라봤던 곳이다. 이곳을 알게 된 건 우연히 아빌라(Avila)라는 도시를 설명할 기회를 얻으며 그 도시의 성녀, 한국에서는 대(大) 데레사 혹은 예수의 데레사로 알려진 스페인의 성녀를 공부하면서였다. 성녀의 삶을 돌아보던 중 성녀께서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선종하신 걸 알게 되었고 꼭 한번 이곳을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석양을 앞에 둔 대 데레사 성녀의 조각상과 미완성의 바실리카 (c)2022.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처음 방문했던 때는 해 질 녘에 가서 마을의 주요 교회들과 박물관의 일부만 보고 성녀의 유해까지는 보지 못했다. 다만 성녀의 조각상 앞으로 펼쳐진 마을을 둘러 흐르던 또르메스 강의 풍경이 웅장하게 아름다웠다.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는 오전부터 방문하여 한번 보았던 장소들도 더 꼼꼼히 살펴보고 마을의 비교적 구석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번의 방문 사이 가장 달라진 점은 나의 마음이었다.


그 사이 나에게는 갑작스레 찾아온 깨달음과 신앙심 사이에서 때로는 감격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던 중이었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질문들 사이에서 결국 주님의 답을 마주했다. 나의 잘못들 사이에서도 늘 나를 바른 방향으로 돌려놓고자 애쓰신 분의 뜻을 보았고 다시는 그런 사랑을 외면한 채 살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이었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마치 응답처럼 새로운 만남과 이야기를 마주했고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알바 데 또르메스를 방문했을 때는 어떤 설렘을 앉고 갔다. 또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하는 그런 설렘이었다. 유럽에 10년을 넘게 살며 얼마나 많은 성당, 또 얼마나 크고 화려한 성당들을 갔었던가. 때로는 그 화려함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어쩔 때는 심드렁했으며 어떤 경우는 그저 학술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보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성당에서도 알바 데 또르메스의 작은 교회당에 모셔져 있던 성녀 데레사의 유해를 마주했던 순간만큼 심장이 내려앉았던 경험을 하지는 못했었다. 성당만큼은 아는 만큼 보이기보다는 믿는 만큼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녀의 글이자 가톨릭 성가의 곡으로도 잘 알려진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글귀와 마주쳤을 때 또 한 번 마음에 감사함의 물결이 일었다.


Nada te turbe
Nada te espante
Todo se pasa
Dios no se muda
La paciencia todo lo alcanza
Quien a Dios tiene
Nada le falta
Solo Dios basta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너를 두렵게 못하니
모든 건 지나가기 마련이고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시니
인내는 모든 걸 이겨내고
아무것도 더는 필요치 않으리라
그저 하느님이면 충분하도다

(* 위 국문은 제가 번역한 것으로 성가의 가사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데러사 성녀의 유해가 있는 교회당과 성녀가 전한 '오직 하느님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글자가 새겨진 휘장 (c)2022.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알바 데 또르메스는 작은 마을이지만 교회당과 수도원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가톨릭 신자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의 박물관을 들어가니 놀랍게도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준비되어 있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자 박물관 직원은 팬데믹 이전에는 한국 순례객들이 많이 찾아왔었다면서 어서 세상이 좋아져 그들을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아직은 상황이 안 좋아 두 번의 알바 데 또르메스 방문에서 한국인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곳을 먼저 다녀간 한국인 신자들의 흔적이 곳곳에 있는 듯하여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어서 다시 많은 분들이 이 작은 마을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은 기도를 했다.


이후 마을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베네딕도회 수녀님들이 만드는 쿠키를 사기 위해 수녀원을 갔다. 너무 고요해 사람이 있긴 한 건지 의아해하며 안으로 들어서니 지긋한 할머니 수녀님이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놀라신 듯했다.


"이렇게 추운데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할머니들이 건네는 이런 핀잔 아닌 핀잔은 만국 공통인 듯하다. 이때가 살라망카 인근 기온이 밤에는 영하 5~6도까지 떨어지는 날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비록 그보다 덜 추운 마드리드에서 온 사람이지만 할머니 수녀님의 기대를 깨버리지 않기 위해 "제가 온 한국은 지금 영하 10도예요!"라며 큰 소리로 센 척을 했다. 할머니 수녀님은 잠시 놀란 기색을 하더니 찬장에서 이것저것 쿠키를 꺼내어 보이신다. 그중 아몬드가루로만 만들었다는 쿠키 한 박스를 사고 9유로라는 말씀에 10유로를 건네며 잔돈은 사양하자 그게 뭐라고 너무나 고마워하시는 할머니 수녀님이 정겨워 마스크 안으로 활짝 웃었다. 수녀님도 마스크 안에서 그렇게 웃고 계셨으리라 상상해본다.


수녀원에서 사온 아몬드쿠키, 투박한 맛이 일품이다 (c)2022.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도시의 그것만큼 화려한 뷰는 아니지만 마을 위쪽에 있는 알바 공작 가문의 성탑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화 그 자체이니 시간이 괜찮다면 꼭 가기를 추천한다. 마침 올라간 사람이 우리 밖에 없어 해가 잘 비치는 곳에 앉아 꽤 차분히 마을과 그 곁을 흐르는 또르메스 강을 지켜보았다. 같이 간 분께서 황새가 드나드는 풍경을 매우 신기해하셨다. 스페인 중부지방의 여느 종탑이나 지붕을 보면 황새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눈에는 흔한 풍경인데 황새가 내는 딱따구리 같은 소리도 신기해하며 들으셔서 나도 괜히 생경한 눈빛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성탑에서 바라본 또르메스 강이 흐르는 마을의 풍경 (c)2022.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돌아오던 길, 두 번째 여정을 함께 해준 분이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아름다운 곳에 사시네요.


사는 곳이라 자주 그 아름다움을 잊고 때로는 사는 곳이라 억지로라도 아름다움을 상기해보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래야 종종 허한 마음이 좀 더 행복할 것 같아서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해준 말이니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 맞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그 말을 고이 접어 마음에 담았다. 다시 또 슬퍼지는 날이 오면 그 말을 펼쳐 나를 둘러싼 모든 아름다움에서 환희를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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