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기도가 울리는 곳, 스페인 옛 수도원을 가다

찰나와 영원

by 이루나

마드리드에서 짧게는 하루, 길어야 2~3일을 머무는 여행자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혹시 어떤 기회로 이 도시에 길게 머물 기회가 생긴다면 눈을 도시 밖으로 돌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마드리드 주변에는 트래킹 하기 좋은 루트도 많고 아기자기한 마을들도 여럿 있다. 그리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유적지도 있으니 이번에 소개하게 될 장소가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이다.


펠라요스 수도원의 옛 모습(좌)과 지금 모습(우) ⓒ 이루나


마드리드 중심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마드리드 주에 속한 작은 도시 '펠라요스 데 라 프레사(Pelayos de la Presa)'라는 곳과 만난다. 이곳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인 1150년에 세워졌던 가톨릭 시토회 수도원이 있다. 공식 이름은 발데이글레시아스의 동정녀 마리아 왕립 수도원(Monasterio de Virgen Maria la Real de Valdeiglesias)이지만 이곳의 현재 지명을 따서 간단하게 펠라요스 수도원(Monasterio de Pelayo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선 마드리드 외곽의 건조한 지역을 꽤 오래 지난다. 그래서 어렴풋이 이 수도원도 황무지 같은 땅 한가운데 위치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나름 숲이 우거지고 강물이 풍부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시토회 수도사들은 물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덕분에 시토회 수도원은 주변에는 늘 물이 풍부하다고 현재 수도원 관리 직원이 전했다.


기도하고 일하는 백색의 수도자

8세기 무렵부터 서고트족의 기독교 은수자들이 생활했던 이곳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로부터 기독교도들의 땅을 되찾는 국토회복운동,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결과로 12세기 레온 왕국의 왕 알폰소 7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알폰소 7세 왕은 이곳에 있던 열두명의 은수자들을 모아 한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하고 이들을 위해 이 수도원을 설립을 명한다. 초기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설립되었던 이곳은 이후 성 베네딕토 규칙을 보다 엄격히 따르고자 했던 수사들이 세운 시토회에 소속되게 된다. 성 베네딕토의 가장 기본 규칙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roa)'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 이곳 수도사들은 각자의 소임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하루에 수차례씩 기도를 드렸으며 이 수도회의 상징인 백색 수도복을 입고 생활했다.


수도원의 식당의 현재(좌)와 과거(우). 이들은 벽에 붙은 긴 테이블에 앉아 침묵을 지킨 채 식사를 했으며 식사 시간 내내 한사람씩 돌아가며 기도문을 외웠다 ⓒ이루나


당시 특히 '일하라(Labora)'는 규칙을 어긴 채 재산 축적에만 몰두하던 일부 수도원과는 달리 이 수도원은 청빈한 생활을 이어 갔으며 그런 그들의 모습처럼 수도원 건물은 별다른 화려한 장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잊혀진 지역이었던 이 땅도 수도원과 함께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고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다만 모든 게 그러하듯 이 수도원도 시간이 지나며 침체되기 시작했고 특히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 속에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자유주의 물결 속 사라진 수도원

가장 번성했던 1400년대는 40여 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1800년대가 되자 그 수는 10명 이하로 줄었다. 노동이 주요한 규칙 중 하나였기에 수도원에서는 할 일이 많았다.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나무도 가꾸어야 했고 수도사들이 먹을 곡식을 일구는 농장부터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약초 농장까지 있었다. (특히 허브인 타임은 항생 효과로 인해 많이 키웠다고 한다.) 수가 줄어든 수사들이 이를 모두 행하기는 무리가 있었으며 특히 1836년부터 시행된 교회의 재산 몰수령*으로 남은 8명의 수도자마저 쫓겨나며 이 수도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스페인 <멘디사발의 재산 몰수령 (Desamortizacón de Medizabal)>

멘디사발은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이자 정치가로 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교회나 성직자의 재산을 몰수해 매각하면 경제 활성화와 소득 재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펼치며 1836~37년에 걸쳐 이를 시행했다. 그러나 정작 매각된 교회 재산을 구매한 건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층이었으며 이로 인해 스페인 교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펠라요스 수도원의 경우도 여러 귀족 가문과 부유한 상업층이 나누어 이 수도원을 샀으며 이 중 한 건축회사는 수도원을 허물어 여기서 얻은 돌을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이름을 가진 건축가, 폐허를 사다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리고만 수도원이 세상에 다시 등장한 건 1974년의 일이다. 어느 날 이 수도원 전체를 판다는 광고가 신문에 뜬 것이다. 건축가였던 마리아노 가르시아 베니또는 그 광고를 보고 마치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 수도원을 구입 후 여생을 수도원 재건에 힘썼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건축가의 두 번째 성(姓) 베니또(Benito)는 이 수도원의 전신이자 수도 규칙의 근간이었던 성 베네딕토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처음 부서진 돌무더기로 온통 폐허였던 이 수도원을 정리하고 재건하기 위해 건축가 마리아노의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는데 이들은 일일이 손으로 바닥의 돌들을 주워 정리했다고 한다. 이 친구들의 얼굴은 현재 수도자의 얼굴이 되어 이 수도원의 창문에 그려져 있다. 처음 이곳에 들어서면 창문 사이로 보이는 이 그림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순간 아직 수도자가 사는 곳인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이 스토리를 듣고 건축가와 친구들의 우정이 정다워 웃음이 났다. 재건을 마무리한 뒤 건축가는 재단을 설립해 수도원을 시에 기부했고 건물 일부는 건축가 후손들이 개인 주택으로 사용 중이다.


수도원 창문에 그려진 재건을 도운 친구들 얼굴, 시토회 수사들처럼 흰색 수도복을 입고 있다 ⓒ이루나


천년의 기도가 울리는 그곳

수도원의 내부를 거닐다 문득 눈을 감고 이 수도원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본다. 봉쇄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수도자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미사를 드릴 수는 없었지만 외부인들을 위한 미사 공간이 성가대석 뒤로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은 무르시아 성당으로 팔려가 그곳에 장식되어 있지만 한때 이 수도원의 성가대석에 있었던 의자의 모습도 떠올리고 그 바닥을 장식했던 아술레호(채색타일)도 다시 고이 깔아 본다. 온전한 제대의 모습으로 시토 수도회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하루에도 수차례 거룩하게 올렸을 미사 풍경을 떠올린다. 수도원 관리소에서 내부에 틀어 놓은 그레고리오 성가 덕분에 정말 그 미사의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다. 눈을 뜨면 흰색 옷을 입은 시토회 수도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옆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외부인들이 미사를 드리던 공간에서 바라본 수도원 교회 모습, 제대와 성가석이 보인다(좌), 성가대석 바닥에 있었던 아술레호의 흔적(우) ⓒ이루나


하지만 눈을 뜨자 지붕은 다 사라지고 뼈대만 남아 푸른 하늘이 다 들여다 보이는 수도회의 교회를 마주한다. 그 뼈대 위로 무심히 흐르는 구름이 낯설어 한참 바라보았다. 멈추어버린 것과 흘러가는 것. 순간 수백 년 세월이 찰나 같고 이들의 기도가 허상 같아 견딜 수 없이 서글퍼졌다가 문득 정말 시간이 흐른다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3차원의 세계까지만 보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공존한다고 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하나의 덩어리처럼 말이다.


그게 정말이라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곳에도 아직 수백 년 전의 수도사들이 함께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서로 보지는 못하지만 분명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유영하는 게 아닐까. 여전히 이 수도원에서 영광의 기도를 노래하고 있을 이들에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 본다. 그리고 돌아와 적은 이 글의 제목을 '천년의 기도가 잠든 곳'으로 썼다가 '천년의 기도가 울리는 곳'으로 바꾼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이 수도원이 그랬다.



<수도원 가는 법>

1. 자동차(추천): 구글 지도에서 수도원 검색하여 이동. 수도원 바로 옆 공터에 무료 주차
2. 대중교통: Principe Pio 역에서 551-04 버스 탑승 후 Urb. Pinos Verdes 역에서 내려 약 10분 도보 이동

* 주말(토/일요일) 10-14시 사이에만 방문 가능
* 입장료: 일반 4유로/인당, 도슨트 투어(약 45분, 스페인어 진행) 6유로/인당
* 수도원 행사나 시즌에 따라 관련 내용은 바뀔 수 있으니 자세한 사항 홈페이지 참조 및 문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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