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Oct 21. 2023

까미노처럼 인생도 2회 차가 가능하다면

두 번 걸어야 보이는 것들

지난해 메세타의 미친바람에 질려 프로미스타의 첫 바에 앉아 좌절하다가 마드리드로 도망쳤었다. 주말 동안 마드리드에서 쉬고 나서야 메세타 구간을 점프해 겨우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또 가장 싫어하는 곳, 끝도 없는 평원 위에 바람과 하늘 그리고 나만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이 지독한 메세타이다.


늘 그렇듯 한 발씩 늦는 나는 순례길을 다녀오고 나서야 순례길이 궁금해졌었다. 까미노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무렵이 되어서야 순례길 사진을 돌아보고 그 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질려서 도망쳤으면서 결국 돌아오게 된 이유이다. 지난 몇 달간 순례길을 그리워하며 본 다큐에서 한 프랑스 순례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길을 걷는 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까미노를 걷는 건 쉽지요. 가야 할 길도 정해져 있고 이정표도 있으니까요. 까미노는 힘들지 않아요."


당연히 너무 힘들다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던 내게 그 말은 오래 잔상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어느 날 문득 이곳에 오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길을 잃어버린 순간에 어떻게든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 우리를 만나고 싶어서. 정해진 길을 걷는 건 평화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지난해 도망쳤던 프로미스타를 다시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고 나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로 가는 교통편도, 여러 번 갈아타고도 알맞은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도 여의치 않았다. 또 도착한 첫날부터 여러 사람과 방을 쉐어하는 알베르게는 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숙소 예약 앱으로 예약 가능한 개인룸을 찾았으나 역시 딱 알맞은 게 없었다. 겨우 마드리드에서 프로미스타로 가는 카쉐어를 예약했지만 프로미스타에 방을 잡지 못하고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다음 마을의 룸을 예약할 수 있었다. 일찍 도착하니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되겠다고 안심하며 배낭을 챙기고 잠들려는 순간, 카쉐어 기사에게 전화가 와서 일정이  바뀌어 예약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숙소는 환불이 불가한 것이라 부랴부랴 다른 루트를 찾아보다 일단 바야돌리드라는 도시로 가는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그곳에서 다시 프로미스타로 가는 카쉐어를 예약했으나 한번 또 취소당하고 두 번째 요청에 대한 컨펌은 받지 못한 채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아침 고속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갈 때까지도 컨펌은 오지 않았다. 정 안되면 저녁에 바야돌리드에서 프로미스타로 가는 기차가 있긴 했지만 해가 진 뒤 한 시간 떨어진 마을로 걸어가 숙박할게 걱정이긴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번거로움보다도 더 길을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건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메세타의 강풍, 알베르게의 밤을 깨우는 코골이, 공용 욕실, 있을지 모르는 베드버그. 이런 걱정들로  까미노를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집이 너무나 아늑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가지 않기에는 너무 그리웠기에 결국 일단 떠나기로 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아직 교통편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가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패기로 떠났다. 다행히 고속버스에 앉자 프로미스타까지 가는 차가 쉐어를 컨펌했고 공지 시간보다 1시간 빨리 출발해도 되겠냐며 오히려 반가운 제안을 했다. 덕분에 바야돌리드 도착하자마자 약 30분을 걸어 약속장소로 갔고 바로 프로미스타로 갈 수 있었다. 바야돌리드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던 카쉐어 청년과의 대화도 즐거워서 한 시간이 금방 지나 어느덧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다시 보니 반갑다 프로미스타야! (C)이루나


넉넉히 이른 오후였지만 일단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로 가서 쉬기로 했다. 모든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마음이 편한 까닭이다. 프로미스타 지역에 강풍 주의보가 내려진 오후였다. 지난해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바람보다도 거셌다. GPS를 보느라 손에 살짝 쥔 휴대폰이 센 바람 때문에 떨어질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걷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난해는 즐기지 못했던 길이었는데 올해는 다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뭉클하고 좋았다.  


이래서 까미노를 두 번씩 걷는 거구나! 걷는데 열중해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인생도 2회 차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사는 삶이라 단지 사는데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던 행복을 2회 차가 되어 알알이 느낄 수 있다면.


돌아보면 그렇다. 다시 살아야 한다면 지겨운 생각이 들어  딱히 바꾸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없는데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땐 있다. 어떤 과거로 돌아가 잠시 살 수 있다면 정말 즐겁게 보낼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이다.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진 않지만 잠시 다시 가서 2회 차 인생을 즐기고 오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앞으로는 단지 사는데만 열중하지 않고 마치 인생 2회 차처럼 즐기며 살 수 있을까. 이번 2회 차 까미노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여유롭게 배낭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강풍이 부는 메세타를 혼자 걸으며 또각또각 손톱도 깎았다. 귀찮게 손톱을 따로 모아 버리지 않아도 되니 정말 손톱깎기 제일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새끼손톱을 깎는 순간 손톱깎이가 망가져 버렸다. 그 순간 오히려 좋았다. 마침 마지막 손톱까지 다 깎았고, 손톱깎이 무게만큼 짐이 줄어 한결 자유로워진 듯했다.


내일은 손톱깎이 무게만큼 가벼워진 마음과 배낭으로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로 향해 간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나와 잠시 밤하늘을 보니 진정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c)이루나

 



망설임, 게으름, 번거로움, 사소한 걱정들을 이겨내고 오늘 드디어 메세타로 돌아왔습니다. 이정표대로 걷는 일은 쉽고 제 다리는 아직 멀쩡하니 이번에도 잘 걸어보겠습니다. 부엔 까미노!

매거진의 이전글 까미노, 너의 색은 파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