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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Aug 25. 2024

네 번째 까미노를 떠나는 이유

하반기 성수기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2주 이상 여유롭게 남았다. 이렇게 시즌, 비시즌이 있는 직업이 누군가에겐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다. 일에만 집중된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휴식이 가능하다는 점은 지속가능한 삶을 누리게 한다.


긴 시간이 주어졌을 때는 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미술관을 가고 예쁜 카페를 가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건 하루 이틀은 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게 일주일이 되었을 땐 그런 휴식은 지루함이 된다. 내일도 쉴 수 있다는 건 꼭 오늘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럼 오늘 나의 몸은 자꾸만 수평을 유지하려고 한다. 어느 순간 그저 방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건 내게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겐 걸을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걸어야 할 길이 필요했다. 걷는 일이 이상하지 않고 걸어야 하는 길의 출발점과 목적지가 정해진 그런 길이 필요했다. 언제부터인가 까미노는 내게 휴식이 되었다. 정해진 길을 그저 걷기만 해도 된다는 것은 수많은 불안과 불확실함이 있는 이 삶에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지! 하루를 촘촘히 계획하지 않아도 매일 반드시 무언가는 성취하는 길, 내겐 까미노는 그런 길이다. 이게 내가 네 번째 까미노를 떠나는 이유다.


지난 6월 팜플로나에서 로그로뇨까지 걷고 왔다. 이번에는 이어서 로그로뇨에서 부르고스까지 걸을 작정이다. 악명 높은 메세타는 부르고스부터 시작이니 이번 길은 여름이어도 꽤나 걸을만한 길이 될 것이다. 사실 분명 한번 걸었던 코스인데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처음 걸었을 땐 단지 앞만 보고 걷느라, 잘못 선택한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벅차 즐겁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딱 한 가지 기억나는 건 로그로뇨를 빠져나올 때 한 공원을 지났는데 거기에는 토끼처럼 토실토실한 다람쥐들이 가득했다는 점이다. 사람을 겁내지도 않아서 강아지들처럼 먹이를 달라고 졸졸 따라왔다. 그 다람쥐들을 이번에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삼십 분만에 배낭을 싸고 아침 일곱 시 반 기차를 타고 로그로뇨로 가고 있다. 기차 창 밖에는 해가 뜨고 내 마음도 설레며 둥실 뜬다. 스페인에 사는 게 좋냐고 많이들 묻는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죠 뭐."라고 늘 대답해 왔다. 사실이기도 하고, 그게 부러움의 질문이었을 경우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감정의 소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뉘앙스였을 경우 역시 불필요한 동조를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하면 이렇게 대답할 거다.


"네, 좋아요. 4시간만 기차를 타고 가면 까미노를 걸을 수 있거든요."


로그로뇨 행 기차에서 바라본 일출 (c)이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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