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살며 여행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누구나 직업인으로서의 페르소나는 자연인 일 때의 그것이 다르듯이, 나 역시 여행 가이드로 일할 때 내 모습과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내 모습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을 할 때 난 잘 웃고, 에너지가 넘치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기반해 빠른 판단을 한다. 비록 나의 의지는 아니지만 규칙적으로 먹고 잔다는 것 역시 지금처럼 새벽까지 안 자고 이런 걸 쓰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영 다르다.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야무지고 밝다는 말이니 앞서 직접 서술한 가이드로서의 내 모습과 상당히 부합하는 듯하다.
사실 개인으로서의 나 또한 잘 웃고 밝기 때문에 이는 어느 정도 타고난 성정으로 볼 수 았겠지만, 확실히 타인을 대하는 방법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가이드로 일을 할 때 난 상대방의 의견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며 손님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스몰토크도 자주 하는 편이다. 이는 같이 일하는 기사, 인솔자, 로컬 가이드나 식당, 호텔의 직원들과도 마찬가지이다. 같이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것, 손님과 가이드로 잠시 만난 사이지만 오랜 지인처럼 친근하게 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요즘 직업인으로서의 나에게 가장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요소이다.
하지만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전혀 다르다. 단골 가게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은 잘 만들지도 않지만 간혹 종종 가던 가게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면 질색팔색하며 발을 끊어 버린다. 사실 한 곳을 좋아하면 질리도록 가는 편이라 가게 주인이 나를 눈치채고 말을 걸 정도가 되면 이미 그곳에 살짝 질려 있는 경우도 많다. 또 누군가 계속 만나자고 보채고 그에 내가 맞춰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거나 책망(!)하면, 아 이건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개인적인 관계의 만남에는 어떠한 의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이엔 오직 즐거움과 - 아주 일부의 경우 한해 - 오랜 시간의 정이 있을 뿐인데, 나와 오랜 시간 교류한 지인들은 아무도 내게 이런 강요를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다 칼같이 잘라버려서 웃프게도 이미 내 곁에 없다. 그러니 지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용건 없는 스몰토크는 더더욱 싫어하며 그걸 전화로 하려고 하면 화가 날 지경이 된다. 전화를 건다는 건 상대방이 통화가 가능한 상황이나 기분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소통으로 느껴진다.
난 그 어떤 외부의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즐겁지 않은 만남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잘 찾지 못한다. 혹시 그런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 내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즐거움이라는 건 물론 많은 변주가 있다. 오랜 지인과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안정감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고, 같은 업계에 종사하거나 비슷한 상황의 사람과는 서로의 고충을 나누고 이해하는 즐거움이 있다. 또 그냥 인간으로서 개그코드가 잘 맞아 말 그대로 만남 자체가 재밌는 경우도 있고,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만날 땐 그 만남이 가진 의미가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나열된 어떤 관계도 내게 절대적인 의무를 지울 순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나 역시 그들에게 이런 의무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내가 외로워지더라도 그 대가로서 그 외로움을 감내하겠다는 결심이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실은 여러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친한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하면 굉장히 의아해한다. 나는 나대로 일을 하면서 남을 통해서 듣는 내 모습이나 내가 스스로 보는 내 모습에 놀란다. 어떤 모습이 더 좋은지 최근 꽤 깊이 생각해 봤는데, 사실 나도 일할 때 내 모습이 더 좋긴 하다. 더 친근하고 덜 예민하고 더 포용적인 모습으로 느껴진다. 얼마 전 같이 투어한 한 로컬 가이드가 "모두가 루나랑 일하고 싶어 해. 근데 오늘 너랑 일해보니 왜 다들 그렇게 말하는지 알겠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척 고마우면서도 내 실제 모습과는 이상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모두와 잘 지내는 편이지만 막상 일하며 만난 사람들과 개인적인 관계로까지 친해진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이게 나의 한계인 것 같기도 하다.
자주 두 페르소나 사이 어색한 괴리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일을 할 때 내가 더 좋아하는 모습이 발현한다는 데는 새삼 감사하다. 아무렴 일을 할 때 유난히 후진 모습이 나오는 것 보단야 훨씬 감사할 일 아닌가! 후진 모습을 견뎌야 하는 일은 지속할 자신이 없다. 그만큼 일을 하며 느끼는 기쁨과 보람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자연인으로서의 나도 되고 싶은 다른 모습이 있었고 그렇게 되어 보려 한때 노력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영 바뀌지 않는 걸. 사실 바뀔 수가 없으니 내가 여전히 나인 것 같다. 한마디로, 추구미와는 조금 다른 나를 붙잡고 산다. 더 시간이 흐르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남을 이해하는 것처럼 나도 그냥 이런 내가 나라고 이해해주려 한다. 여전히 직접적인 만남은 피하며, 종종 이렇게 새벽녘 글로만 과도한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