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가까워질 무렵 집 현관문 앞에 대림환을 만들어 두었다. 세상에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탄 대축일(12.25) 전 4주간 매주일에 하나씩 초를 밝히는 장식이다. 첫 초를 켤 때는 언제 네 번째 초까지 켜나, 어서 빨리 모든 초를 밝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매주일은 빠르게 돌아왔다. 세 번째 초에 불을 밝힐 때쯤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사한 일주일을 지나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세 번째 초를 밝히고 있구나. 아마 매번 같은 주기로 반복하며 초를 밝히지 않았다면 떠올려 보지 않았을 생각일 거다. 그러자 지난 일주일간의 시간이 모두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 한 주간 얼마나 많은 세상의 고통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뜻하지 않은 고통을 마주해야 했던가. 그 생각은 결코 내가 그들 중 하나가 안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은 아니었다. 내 삶이 나의 온전한 의지와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의 자각이었다.
반복적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크리스마스 시기부터 주님공현대축일(1.6)까지 스페인은 가장 큰 명절 시기이기도 하다. 모든 가족이 모이고 1년 전에 먹었던 비슷비슷한 명절음식을 먹는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는 일은 기쁨과 함께 피로감도 같이 주는 일이라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시기를 마냥 기쁘게만 보내지는 않았다. 가족들을 만나고 오면 숙제를 해결한 느낌이었고, 지나치게 많은 음식과, 매년 먹는 비슷비슷한 음식 앞에서 투덜거리기도 했다.
올해라고 나의 아량이 갑자기 넓어졌을 리 없다. 여전히 가족들을 만나기 전부터 반쯤은 이 모임을 번거로워하고 있었으며, 기껏 차려놓은 음식 중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은 요령껏 피하면서도 너무 맛있는 양 호들갑을 떨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음식이 맛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고 당연히 너무 맛있지요!' 이런 류의 반복적인 대화에도 이미 반쯤 질려 있었다. 욕심껏 와인을 들이켰다가 다음날 속이 쓰려 불편해하고, 오늘은 진짜 조금만 먹어야지 하고는 그다음 날도 또 많이 마시고 먹었다.
그러나 이 모든 지겨운 반복적인 연말 풍경을 지내며 나는 아주 자주 감사하고 행복했다. 반복이라는 평온. 한 때는 미치도록 견디기 어려웠던 그 평온함을 이제야 소중히 끌어안아 본다. 도전도 발전도 그 어떠한 극적인 새로움도 결국은 이 평범한 하루를 지속하게 해주는 작은 양념일 뿐. 궁극적으로 언제나 바라는 건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평범한 나날이었구나. 언젠가 이 반복되는 사이클에서 하나씩 사라질 소중한 것들을 두려워하며 떠올려 본다. 궁극적으로는 아마 나 자신일 거다. 그날이 오면 이 반복된 평범한 하루가 실은 가장 찬란하고도 궁극적인 행복이었다는 사실도 더 알게 되겠지.
작년과 판박이인 한 해의 마지막 하루를 보낸다. 반복적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먹을 포도 12알을 준비하고, 샴페인을 사두었다. 반복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평온한 잠에 들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이 후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눈 감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고이고이 아껴 산다. 올해도 평범한 한 해를 보낸 모두에게, 올해만큼의 평범한 한 해가 찾아오길,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는 부디 새해는 기적 같은 평범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무사히 살아 쓰고 읽느라 모두가 수고한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