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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Aug 22. 2024

만 서른아홉 번째 생일은 원형탈모와 함께!

혹시 나 울어...?

지난 출장  호텔 욕실에서 서서 머리를 말리는데 오른쪽 두피 깊숙한 곳에 낯선 부재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가르마인가 했는데 유난히 훤히 드러나는 두피의 살색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호텔 욕실에는 거울에 달린 보조 거울을 비롯하여 여러 거울이 사방에 배치되어 있기에 두피 안쪽에 비밀스럽게 숨겨진 그 공허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원형 탈모다!"


두 눈으난생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 존재를 알아챘다. 만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3주 앞둔 여름이었다.




스스로 이미 진단을 내리고 나서도 이리저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머리카락이 좀 듬성하게 난 것은 아닐까. 불행히도 아니었다. 확대경으로 본 두피의 그곳은 확실히 맨들맨들 머리카락이 없었다. 다시 한번 그 무존재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유튜브를 열었다.


원.형.탈.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써본 적도 없는 그 단어를 꾹꾹 눌러 검색창에 썼다. 주르륵 여러 검색 결과가 떴다. 의사가운을 입은 사람이 썸네일에 등장하고(전문적일 것이다) 영상 길이가 10분이 넘지 않으면서(영상 보는 걸 안 좋아한다) 명확히 알고자 한 콘텐츠(나 머리 다 빠지는 거 아니겠지?)가 있을 법한 영상을 클릭했다. '원형탈모의 원인과 치료법'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두세 개의 영상을 살펴본 결과, 원인은 스트레스 또는 면역질환이 이유일 수 있으며 아직 한 개만 생겼다면 80% 이상은 자연 치유가 되기 때문에 당장을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충격은 가시지 않았기에 온갖 방식으로 두피 깊숙이 자리한 그 무존재의 존재를 사진으로 남기고는 가족과 가까운 지인에게 전송했다.


<어떡해ㅠㅠ 나 원형탈모 생겼어ㅠㅠ>




아무리 생각해도 스트레스가 원인은 아닌 듯했다. 살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머리 한구석이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이드라는 직업 특성상 업무나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겨도 그 요인은 대개 일주일 내 소멸되기 때문에 굳이 스트레스 지수를 따지자면 적은 편에 속했다. 그럼 혹시 몸에 더 큰 문제가 생겨 머리가 빠진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잠시 엄습했지만 오래 그런 생각 사로잡혀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거봐 스트레스 없다니까) 금세 잊었다.


하룻밤이 지나 처음 충격이 무뎌지자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간 슬슬 눈에 띄는 흰머릴 얼마나 미워했던가! 왜 유독 오른쪽에만 나냐며 머리를 빗을 때면 오른쪽을 앞머리와 옆머리를 수없이 째려보지 않았던가! 그러다 너무 꼴 보기 싫은 건 거칠게 잡아당기며 응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흰머리조차 없는 민머리 구역을 발견한 이후로 흰머리의 존재가 소중해졌다. 너희는 여기에 잘 뿌리내리렴, 어디로 사라지지 말고,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왜 머릿결이 더 찰랑거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그저 튼튼히 두피에 잘 붙어 있기만 하면 감사할 노릇이지 감히 찰랑찰랑 빛나기까지 바랐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던 39세여!


남은 머리카락은 반드시 사수하고 더 건강히 살겠다며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한참 하지 않았던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실내 사이클을 고작 30분가량 돌린 건데도 여름이라 그런지 땀에 금방 흥건히 젖어 꽤나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덤이다. 이러니 더운 날씨도 고마워졌다. 덥지 않았더라면 겨우 이 정도 운동에 이렇게 땀이 나진 않았을 거니까. 비오틴 영양제도 잊지 않고 챙겨 먹고 새로 산 탈모방지 샴푸로 머리를 감을 때면 정성스럽게 조심조심 감는다.


사실 올 초에는 치아로 좀 고생했다. 임플란트를 하느냐 마느냐까지 고민해야 했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명품백을 사던 돈을 건강에 쓰기 시작할 때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큰돈 들어가는 일이 나 자신을 꾸미고 즐겁게 하는 일에서 점점 나를 돌보는 일로 바뀐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올초 명품백이 사고 싶어 여러 모델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얼추 임플란트 가격과 비슷했다. (참고로 스페인에서 받은 임플란트 견적은 거의 5백만 원에 육박했다.) 결과적으로 임플란트는 하지 않았지만 내 치아랑 맞바꿀 만한 가격의 가방도 사지 않았다. 앞으론 명품백이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튼튼한 치아가 나를 돌봐주겠구나 생각하니 명품백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졌다. 이 돈은 아껴 두었다 아주 나중에 치아 살 때나 써야지.


거참 만 서른아홉의 푸념치곤 너무 앞서 갔나. 마지막 30대의 생일 선물을 원형탈모로 당겨 받았으니 당분간은 이럴 듯하다. 100세 시대가 되어도 노화가 시작되는 나이는 비슷하다. 예전처럼 폭삭 늙지 않을 뿐 노화가 시작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아직 청춘이라고 어디서나 당당히 외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눈물 나게 좋았던 삼십 대와 보내는 마지막 1년이다. 이젠 몸도 마음도 잘 늙는 법을 배우고 싶다.




덧붙이기

오랜만에 쓰는 글이 원형탈모에 대한 이야기라니. 저 또한 이 글을 쓰려고 브런치에 들어오며 "원형탈모 정도는 생겨야 내가 글을 쓰는구나." 싶어 내심 웃겼습니다. 더 건강한 습관으로 지내고 싶어도 이렇게 쉬는 기간이면 영락없는 올빼미가 되는 건 어찌 고치면 좋을까요? 차라리 가이드 출장을 갈 때면 영양 균형이 잘 잡힌 식사를 하고, 많이 걷고, 푹 자니 더 건강하게 지낸다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하루아침에는 힘들겠지만 마지막 삼십 대는 좀 더 건강한 습관을 가져 볼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술도 두 달째 안 마시는 중입니다! (원래 애주가입니다.) 여전히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이 생긴다면 마실 의향은 가득하지만 단지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를 찾거나 만남은 안 하고 있어요. 이것만 안 해도 상당히 건강해진 기분이 들어 뿌듯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도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라며, 다음은 좀 덜 비극적인(?) 글로 만나요!


이번 여름 휴가지였던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포르투에서 바라본 석양 (c) 이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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