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매 순간 시작과 끝에 서있는 일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지난 하루가 저무는 때이다. 오늘 맞이한 가을 아침은 한 해로 보자면 저무는 계절의 아침이다. 이렇게 시작과 끝의 경계가 무의미하니 굳이 그 둘을 나누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계절의 지는 해 사이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습관이다.
가을 노을이 번지는 마드리드 하늘 (c)이루나
며칠 전에는 운전을 하고 시내에 갔다. 만나기로 한 일행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다소 익숙해진 운전대 앞에서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도로를 지나다 보니 낯익은 길에 접어들었다. 그 길은 올봄, 지난 10년 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버린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갔던 사무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 봄에는 구글맵을 켜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가장 가기 쉬운 사무소가 있는 곳을 찾아 거기로 갔다. 일찍 집에서 나섰기에 도착해보니 조금 시간이 남아 바로 사무소로 안 들어가고 그 길 벤치에 앉아 있었더랬다. 금요일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차들이 많았고 저마다의 곳으로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그 차들을 바라보던 때의 공기와 온도 햇빛의 색감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긴 겨울이 지나고 막 시작하는 봄의 따뜻한 햇살이었고 그 시간에 집이 아닌 시내에 있어본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 무렵 다시 직장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 직장이 대중교통으로 가기 번거로운 외곽에 있기에 지치지 않고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때는 그 두 가지 다 하기 싫고 자신이 없었다. 그토록 힘들어했던 규칙적인 근무시간, 쓸데없이 진지해져야만 하는 일들,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 그런 것들이 직장인으로 회귀하려는 발걸음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위해 굳이 차를 계약하고 운전까지 배워야 한다는 건 더더욱 싫었다. ‘아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었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가던 길에는 그런 마음을 걸음마다 꾹꾹 눌러 담아 터벅터벅 걸어갔었다. 그러나 그날 그 오후에 벤치에 멈추어 앉아 분주히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용기와 의지가 샘솟았다. 회사를 다니고 운전을 하는 일, 그건 지금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저 수많은 사람들이 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또 묵묵히 하는 일들이었다. 내가 겁낼 일도 두려워할 일도 또 굳이 주어진 기회까지 내치면서 포기할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하며 그 길을 지나다 곁눈질로 슬쩍 내가 앉아 있었던 바로 그 벤치를 보았다. 그땐 저기 앉아서 이렇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경외심과 부러운 마음으로 쳐다봤었는데 이제 내가 운전을 하며 그 길을 지나고 있다니 쓸데없이 마음이 뭉클했다.
얼마 전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그들과 함께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가을 도로를 운전해 달렸다. 앞에 차가 느리게 간다고 투덜거리며 추월도 하고 저 단풍이 너무 예쁘다며 감탄도 했다가 비가 오니 비 노래를 듣자며 <비 오는 거리>를 틀어 놓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반가운 얼굴들을 태우고 차를 운전해 달리는 기분이 좋았다.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2022년의 가을을 떠올린다면 나는 이날이 떠오를 것 같다.
흐리면 흐린대로 좋은 가을날 (c)이루나
어느덧 가을, 자꾸만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다. 올봄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아직 어리고 겁 많은 사람이었는데 오늘의 나는 아주 조금은 더 성장했다. 다 커버린 뒤에도 여전히 삶은 내게 숙제를 준다. 자주 그 숙제가 버겁고 힘들지만 올가을에는 그런 투정보다는 그 숙제 덕분에 여전히 성장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더 새겨 본다.저무는 계절이 와도 저물지 않고 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