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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an 25. 2023

새벽출근, 반년만에 포기합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름 근무가 끝나고 회사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제한적 자율출근제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제한적인 이유는 아무 때나 출근해 8시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게 아니라 7시-16시, 8시-17시, 9시-18시, 10시-19시 중 하나의 시간대를 선택해 근무하는 것이었다. 오후 4시 퇴근! 하루를 두 번 사는 느낌!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이 시간대를 선택했다.


어느 출근길, 시동 켜기 전. 시간은 6:21을 가르킨다 (c)이루나


처음에는 아주 좋았다. 1시부터 2시까지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점심 먹고 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라 체감적인 근무시간이 짧아진 기분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퇴근하는 기분도 좋았고 그래서 처음에는 오후시간을 활용해 부지런히 놀기도 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저녁형 인간인 나는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취침시간을 당기기가 어려웠다. 절대 12시 전에 잠이 오지 않았다. 출근하면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서너 잔씩 때려 마시면서도 여전히 늦게 잠이 들었고 5시 50분에 기상했다. 매일 취침시간이 6시간이 채 안되었고 보통 5시간 반, 어쩔 때는 4시간 대로 잔 적도 있었다.


주말이라고 더 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늦게 잠자리에 드는데 주중 내내 일찍 일어난 이력 때문인지 아무리 늦어도 8시 전에는 눈이 떠졌다. 결국 주말에도 8시간 이상 자는 날이 없었고 거의 주중과 비슷하게 5시간에서 길어야 6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그러니 늘 피곤했다. 빈속에 때려마시던 아메리카노와 피곤을 상쇄하기 위해 메가도스라며 하루 권장량의 1000%씩 때려먹던 비타민들은 내 속을 뒤집어 놨다. 누군가 위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괴로워했던 어떤 밤에는 숨이 안 쉬어지고 목이 졸리는 느낌에 자다가 두 번이나 깨기도 했다. 증상을 찾아보니 역류성 식도염이 의심되었다.


피로는 계속 누적되어 갔고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며 피부도 부쩍 상하고 얼굴도 어쩐지 근심이 가득해진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야근을 몇 번 했는데 7시에 퇴근해도 12시간이나 회사에 있었던 셈이고 10시까지 근무한 날에는 거의 15시간을 회사에서 보낸 셈이 되었다. 아침에 1분이라도 더 자려고 화장은 거의 안 한 지 오래이고 머리도 자주 젖은 채로 집을 나섰다.


처음 달 보며 별 보며 운전할 때 예쁘다고 감동하던 기분은 잊은 지 오래이며, 무엇보다 4시에 퇴근해 집에 온다 한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쳐 쓰러져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운동을 하려고 해도 누적된 피로에 오히려 더 안 하게 되어 버리는 악순환까지.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 좀 늦는다고 할까' '오늘 반차 쓸까' '오늘 1시간 늦게 출근한다고 할까' 여러 선택지를 머리에 떠올려보지만 진짜 죽을 만큼 힘든 게 아니면 일단 간다는 -나이 먹고 드디어 생긴- 약간의 악바리 근성 덕에 한 번도 저 카드를 사용해 본 적은 없다. 회식한 다음날은 새벽 6시 반에 차 몰았다가는 음주운전 될 것 같아서 사전 허락 하에 늦게 출근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오늘도 꾸역꾸역 일어나 컴컴한 도로를 가로지르며 출근하다 보니 아무래도 이렇게 한밤중에(스페인 1월 말의 일출시간은 8시 반이기 때문에 내가 출근하는 6시 반은 진짜 한밤 of 한밤 중이다.) 일어나 움직이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사무실에 도착해 커피부터 때려마시고 아무래도 피부가 상하긴 상한 거 같아서 100유로가 넘는 세럼을 사달라고 남편에게 보내놓고는 퇴근길에 드디어 선언하고 말았다.


저 내일부터는 8시 출근으로 바꾸겠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겠어요!


막을 내렸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새벽형 인간의 삶. 반년 가까이 살아도 절대 적응되지 않던 그 삶. 내일부터 고작 1시간 더 자는 것인데 마음이 매우 풍요롭고 너그러워져서 이렇게 글도 쓴다.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는 차를 몰면 출퇴근 시간이 획기적으로 주니까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돌아보면 지난 반년 간 더 아등바등 산 것 같다. 절대적인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지면 뭐 하나.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할 것을. 매번 쳇바퀴 도는 삶 같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오늘의 나는, 내게 새벽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자는 것이라는 것도. 잠시동안 내가 새벽형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지 뭐야! 과로사로 죽기 전에 아니란 걸 알아서 다행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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