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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r 02. 2021

집시, 그 가혹한 아름다움

팜므파탈 까르멘, 플라멩코 그리고 앙리 루소

"집시"


듣기만 해도 어쩐지 이국적이고 매력적이다. 이국적이라는 것은 낭만적이기도 하다. 바람결에 오렌지 꽃 아사아르 향이 퍼져 괜스레 마음을 들뜨게 하는, 스페인에서 가장 이국적인 도시 세비야에는 그래서 낭만적이고도 비극적인 집시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운 집시 여인 까르멘과 그녀를 사랑했던 군인 돈 호세. 아사아르의 달콤한 향이 마음을 간지럽히지만 않았어도, 세비야의 눈부신 태양이 눈을 멀게 하지만 않았어도, 까르멘의 도발적인 춤사위만 보지 않았어도 돈 호세는 평범하고 착실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멘과 사랑에 빠져 군대도 탈영하고 도적질을 하며 떠돌던 그는 견딜 수 없는 질투와 갈망에 그토록 사랑하던 까르멘을 직접 찔러 죽이며 끝내 파멸하고 만다.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가 스페인을 여행하며 친해진 한 백작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 <까르멘>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집시 여인 까르멘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국적이면서도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처음에는 놀라다가도 잊히지 않는 얼굴" 

(Una belleza extraña y salvaje, una cara que sorprendía al principio, pero que no se podía olvidar)


<집시의 춤(Un bal de Bohémiens)>, Adolphe Bayot, 1842


후에 조르주 비제를 통해 오페라로 재탄생된 까르멘의 포스터 속 모습은 글의 묘사보다 한층 더 노골적이고 농염한 모습이다. 군복을 입은 돈 호세의 목을 나른하게 감싸 안고 입을 맞출 듯 말듯한 모습이나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한 손에 담배를 쥔 채 거만하면서도 교태롭게 웃는 카르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팜므파탈, 그 자체이다.


참고로 담배는 스페인의 이사벨과 페르난도 국왕 부부의 후원으로 신대륙 항해에 성공했던 콜럼버스가 유럽에 가져왔던 신문물이었다. 이 시기 세비야는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배들의 내륙항구가 있던 도시였다. 덕분에 세비야에는 현재는 대학교 건물로 사용 중인 담배공장이 세워지는데, 이야기 속 까르멘은 바로 이 담배공장의 여공이었다.


극화된 작품의 이미지로 표현된 팜므파탈 집시 여인 까르멘


그러나 스페인의 집시 여인은 정말 이토록 자유롭게 사랑을 할까? 


그 대답은 '글쎄요'이다.


스페인 내 집시의 생활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유교문화'와 닮아 있다. 특히 효제 사상과 남존여비가 아주 뚜렷이 드러난다. 집시들의 인생은 크게 청소년 이전까지의 유년기, 그리고 결혼 전까지의 청년기, 그리고 결혼 생활을 하는 장년기와 이후 중노년기 이렇게 4단계로 구분된다. 대체로 결혼을 매우 빨리하기 때문에 4~50대가 되면 이미 중노년기에 접어든다.


그들은 그들만의 법도가 있기 때문에 중노년기 어른들은 가정과 커뮤니티 내에서 굉장한 권력을 지니고 존경을 받는다. 이는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톨릭 축일 만성절(11.1)이면 스페인에서도 성묘를 하는데 이날 공원묘지에는 유난히 많은 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집시의 묘이다. 어른을 존경하는 만큼 돌아가신 가족에 대한 예의도 각별해서, 보통 꽃을 놓고 잠시 주변을 정리한 후 돌아오는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여러 세대의 가족이 전부 모여 오랜 시간 머물다 온다.


여자 집시의 경우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권력 하에, 결혼 후에는 남편의 권력 하에 놓이는데 이를 실감케 하는 충격적인 전통이 있다. 바로 집시 결혼의 하이라이트로 불리는 '손수건 시험'이다.


손수건 시험은 결혼식 도중 신부의 성기에 하얀 손수건을 집어넣어 피가 묻어 나오는지 여부를 통해 처녀성을 확인하는 관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결혼식이 2~3일에 걸쳐 마을 축제처럼 성대히 열리기 때문에 버진로드에 서있던 신부를 갑자기 데려가 시험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총각 딱지를 확인하는 시험은 없다.


이미 없어진 전통은 아닐까? 비교적 최근인 2019년 스페인 리얼리티 쇼 출연한 한 집시 여성은 이 손수건 시험에 대해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한다면 더 존중받을 수 있다'며 자신 역시 결혼식에 이 관문을 거쳤음을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식과 손수건 시험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나이는 20대였다. 밀레니얼 세대까지도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언제나 예외는 있다. 법대를 졸업 후 변호사를 준비한다던 한 집시 소녀는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집시 결혼은 하고 싶지만 절대 손수건 시험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밝혔다. 당연히 긴 인터뷰 내용 중 바로 저 말이 헤드라인이 되었다. 왜 이 집시 소녀의 법대 졸업이 기사거리가 되었는지는 스페인 내 집시들의 대학 진학률은 2%에 불과하다는 수치로 답할 수 있겠다. (다만 집시 커뮤니티 내 여성 억압과는 달리 이 2% 중 80%가 여성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최근 변호사, 정당인 등 사회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집시들도 늘고 있는데 대학 진학률의 성비가 보여주듯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스페인 세비야 플라멩코 공연


한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중 하나이자 스페인 대표 민속문화인 플라멩코 아티스트의 상당수는 집시이다. 피 토하듯 내지르는 노래와 기타 선율에 맞춰 격정을 손 끝과 발에 담아 추는 춤. 이 춤은 아이들이 분에 못 이길 때 발을 구르며 떼를 쓰는 모습과 닮았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무대바닥을 부술 듯 구르며 춤을 춘다. 무대를 직접 보다 보면 그 소리와 진동에 심장이 울려 손에 힘이 들어가고 땀이 난다. 화려한 수가 놓아진 붉고 검은 숄을 흔들며 노려볼 듯이 뜬 무희들의 깊고 어두운 눈과 마주칠 때면 보는 이 역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 집시 무희들의 춤은 열망이었을까 갈구였을까 한이었을까.


이국적인 외모, 자유롭게 떠도는 이미지와 더불어 이런 정열적인 예술의 매혹이 더해져서인지 그녀들의 실제 삶이 어떻든 여전히 집시 여인은 많은 예술가들의 영원한 뮤즈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처럼 말이다.


푸른 달빛이 드리운 사막에 누워 잠을 자는 떠돌이 집시 여인. 그녀 곁에는 생명수가 될 물병보다도 더 가까이에 악기 만돌린이 놓여 있다. 목숨 따위가 예술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간소한 삶처럼 번뇌도 미련도 없는 고요한 얼굴에는 그날의 피로만 옅게 느껴진다. 맹수인 사자라 할지라도 그 영혼을 감히 갖지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다.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여인(La Bohémienne edormie), 1897>


그나저나 집시 여인 <까르멘>의 원작자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참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는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를 다뤘으며 특히 러시아 문학의 프랑스어 번역에 큰 일조를 했던 번역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스페인 배우가 썼고 자신의 편집과 번역을 맡았다며 <Clara Gazul(1825)>이라는 희곡집을 발표했다. 비록 판매 수익은 적었지만 상류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끈 덕에 당시 프랑스의 온갖 유세의 살롱에 특별 초대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였다. 원작자인 스페인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썼기 때문이다.


이후 2년 뒤에 발칸반도 서부 일리리아 지방의 민요모음집이라며  <La Guzla(1827)>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유심히 보면 앞서 속였던 희곡집 제목과 스펠링 순서만 교묘히 바꾼 걸 알 수 있다. 그렇다. 이것도 가짜이다. 그는 일리리아 지방이 아닌 자기 집에 앉아 두세 권의 책을 참조해 15일 만에 멜로디를 만들고(!) 일리리아 지방의 언어를 이용해 민족색을 입힌(!!) 가짜 민요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게다가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독일어와 러시아어로도 번역되었는데 러시아어 번역자는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시구로 잘 알려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었다.


그러고 보면 <까르멘>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 본인자신이 쓴 소설 속 집시 여인 닮았다. 장난스러운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스페인만 최소 4번은 왔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해 이리저리 떠돌았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수많은 애인을 두었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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