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원 Oct 25. 2024

마당에 있는 집에 사는 꿈

자식의 시선에서 바라본 부모님의 부동산 연대기

당신이 살아가는 도시를 그리고 공간을 사랑하시나요?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이리저리 풀어봐도 확실히 나의 고향이라는 공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당신들은 그런 도시를 가지고 계신가요?



나의 출생지는 연남동이다. 이렇게 젊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 이전 90년대의 연남동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고 들었다. 나의 부모님은 넉넉지 못한 사정에 종로로 쉬이 출퇴근할 수 있는 값싼 집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빼곡히 붉은 벽돌집이 줄 서있던 그곳에서도 썩 좋은 가격의 집을 찾지는 못했는지 결국 그들은 연남동의 한 옥탑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절 연남은 서울의 중심지로 출퇴근하는 값싼 자취방을 찾는 이들의 성지였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런 옛 감성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들여 감성적인 상권이 생겨났고 90년대생인 내가 어른이 되어 자취를 하기엔 넘볼 수 없는 값 비싼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동생이 생기며 우리는 외갓집이 있었던 부천으로 터를 옮겼다.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 근처의 빌라였고, 그 빌라의 계단이 그들은 끔찍이도 싫었던 것 같다. 20년이 지나도록 주택을 살아본 기억도 없는 우리는 모른다며, 그때 그 계단을 욕하곤 하였다. 정말 그 계단이 그들을 아파트 예찬론자로 바꿔놓은 것이었을까?


할머니 집에서 멀지 않은 인천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개발된다는 소식으로 나의 부모님은 꿈꾸던 신축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다. 논밭이 있던 미개발 지역에 주거 단지를 지은 직후였기에 내가 살던 집 뒤로는 여전히 넓은 논이 이어져 있었다. 어른들은 그 논이 언젠가 메워지고 집 값이 오르기를 기대했겠지만 그런 일은 우리가 그곳을 떠난 뒤에야 일어났다. 새롭고 연고 없는 도시로의 이사를 한번 더 마치고 크고 좋은 집에 만족하며 이사를 축하하는 저녁 식사를 할 때였다. 뉴스에선 우리가 살던 그 동네가 2기 신도시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밤의 파티는 취소되었다. 


더욱이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이사한 곳이 먼저 신도시 개발이 확정되어 그 개발 호재에 따라 신도시 바깥 인근에 지어지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원하던 신도시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는 역시 집 값이 비쌌기 때문이고 입주가부터 몇 배는 차이 나던 그곳은 후에 더 큰 부를 끌어 모았으며 우리 집은 헐값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부모님의 사정 덕분에 나는 20년간 8개의 집과 8개의 도시를 거치는 동안 거의 매번 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그렇게 많은 이사를 한 것은 다른 곳에는 개발 호재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들의 기대 때문이었고 지금에 와 돌아보면 비가 오면 개구리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아파트의 집 값이 뛴다는 건 마치 로또 당첨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정상 집 값이 몇 배가 뛰었다거나 집을 팔아 몇 억을 벌 수 있는 사람들과는 애초에 다른 시작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90년대 생인 나도 논에 물을 대어 스케이트를 탄다거나,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는다거나 하는 흔치 않고 강렬한 기억을 남길 수 있었고 그게 너무 많은 이사로 정 붙일 곳 없었던 나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정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파트는 꿈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을 닮았기에 그걸 가지면 흔들릴 것이 뻔했다. 


사랑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싶다. 나의 오랜 꿈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