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니즘
이번 목차는 어쩌면 상당한 폭로(?)가 될 수 있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지 사실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 어떤 요인보다 ‘인간관계’가 정신건강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다고 생각하고, 제작자는 특히나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기에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상당한 책임감을 안고 쓰는 글! 제작 업무를 하며 만나는 빌런은 우리들의 정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PD 입장에서 만나게 되는 팀원은 대개 이런 유형이다.
1. 연예인
2. 일반인 출연자
3. 촬영 협조자 : 타 기업 직원들 및 장소 협조자 등
4. 작가진
5. 연출진 : 내부 연출, 외부 연출, 프리랜서 등
6. 상사
어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지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지만 기본은 이렇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유형은 1, 4, 5번이다. 다른 직업이 아니라 ‘제작자’이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을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예인, 작가, 그리고 연출진(PD). 그들은 팀원으로 일하기에 어떨까? 그들이 빌런으로 변하면 어떨까? 첫 번째 유형이자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연예인부터 다루어본다.
1. 연예인 혹은 인플루언서: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들은 제작진에게 사려 깊게 행동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존재라 자의식이 높고, 모든 것이 준비된 판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제작의 아이디어, 방향성, 소품 준비, 현장 정리 등은 모두 제작진이 수행하고, 이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사람 역시 제작진이다. 연예인을 위한 ‘서포터’가 된다는 생각에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제작 방향은 전적으로 제작진이 결정하니 오히려 깔끔하다. 판이 깔리면 대본 이상으로 놀아주는 것도 그들이기에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리고 요즘에는 함께 일하는 모든 스태프에게 친절한 연예인도 많다. (A급일수록 이렇다는 아이러니 ^0ㅠ)
하지만, 몇몇 경우는 제작진 입장에서 힘들다.
- 이유 없이 촬영을 펑크내거나 지각하는 유형
- 술자리에서 같이 놀아주기를 바라는 유형
- 신체 접촉을 하는 유형
- 연출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유형
- 촬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분위기를 저해하는 유형
위와 같은 유형들은 내가 직접 겪었거나, 주위 제작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전히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무지막지하게 대우받고 싶어 하고,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자세히 말하지는 않겠다). 일반인보다 표현도 직설적이고 강하니 샌님 제작자는 조금 놀랄 수도 있다. 다른 직군에서도 이런 빌런을 만날 수 있지만, 연예인은 특히 갑의 위치에 있기에 더 힘들다. ‘팀원’이 아니라 마치 어르고 달래야 하는 상사. 도움을 받기보다 기가 빨리는 아이러니. 그렇기에 연예인들은 내 프로그램을 살려주는 귀인이 될 수도, 내 스트레스 유발의 제1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빌런 출연자가 있을 때 제작진은 서로 분노하고, 겨우겨우 위로하며 서로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준다. 애초에 이런 스트레스를 안 받고 제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제작자는 연예인이 얼마나 친절한지보다 얼마나 시청률에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섭외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들과 협업하면서도 제작자의 멘탈을 잘 관리하는 방법은 후술 할 예정이다.)
4. 작가진: 잘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열심히 하는 작가님을 만나면 행복하다. 모두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이니 특별한 상하관계가 없고, 함께 정성적인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서로 공감도 된다. 작가님들은 주로 자료조사와 대본 작성(창조), 연예인 관리(사회성)를 하는데, 빠릿빠릿하게 캐릭터를 잡고 구성을 해주거나 연예인을 술술 다루는 모습을 볼 때 존경심이 든다. 전화로, 미팅에서, 술자리에서 출연자를 주무르는 그들의 입담은 최고다. 특히 PD는 편집에 들어가면 출연자를 챙기기 쉽지 않은데, 그럴 때 훌륭한 작가님이 있으면 섭외와 구성 면에서 기대기 쉽다.
그러나 정반대 작가님을 만나면 상황이 크리티컬 해진다.
나는 실제로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다. 연예인에게 아이템 방향을 설명하는 것도 못하던 작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한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함께 소통하자며 연출자에게 전화 상황에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분이었다. 사실 프로그램의 방향성이란 게 시청률을 좇으며 그때그때 바뀌기 십상이라, 작가는 이를 연예인에게 전화해서 잘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는 분명 스트레스다. 다루기 어려운 출연자일수록 더더욱. 하지만 이는 누군가 해야만 하고 그 역할은 보통 작가가 맡는다. 그런데 해당 작가는 모든 소통에 연출진들이 함께해 주길 바랐다. 그러곤 일이 잘 풀린 것에 안도하며 퇴근했다. 심성이 나쁜 작가는 아니었다. 정말 도움이 필요했던 게다. 하지만 연출진들은 그 통화 이후 다시 편집해야 했다. 이거야말로 분업의 실패가 아닌가?
물론, 상황에 따라 누구나 실수를 한다. 필자도 한다. 하지만 작가와 PD처럼 같은 대등한 팀 구성원이면서, ‘본인은 도움을 받지만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건 어디에서나 허용되지 않는다. 특히 작가에 비해서 PD의 업무가 과중되는 경향이 크기에 (영상 작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작가는 본인의 일을 정말 잘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PD가 마음 놓고 편집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같이 일할 작가님의 레퍼런스 체크는 정말 중요하고 이미 합을 맞춰본 작가님들과 일을 하는 것이 좋다.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5. 연출진: PD의 역량은 기획과 연출, 편집에서 드러난다. (물론 섭외도 잘해야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짐은 작가님과 함께 지고, 주로 높은 연차의 PD가 진다.)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도 잘 내고, 무리수 안 두고, 현장 연출도 술술 하는 PD는 귀하다.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가 잘 나오면 촬영의 방향성도 뚜렷하고, 그러면 촬영이 잘될 확률이 높아진다. 편집이 잘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 PD를 원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귀한 PD는 편집을 잘하는 PD이다. 사실 기획도, 연출도 팀원 모두와 함께 할 수 있기에 개인기의 비중이 작지만, 특정한 편집 ‘구다리‘만큼은 한 PD가 책임지기에 이 능력은 뚜렷한 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편집을 잘하는 PD님은 회의 시간에 좀 조용해도 괜찮다. 어차피 시사 시간에 환상적인 편집 결과물로 힐링(?) 시켜줄 테니까 말이다. 그런 PD가 있으면 연출진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시사의 퀄리티가 점점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PD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못하는 PD님, 작가님 중에 골라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무조건 ’못하는 작가님‘이 낫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할 일을 못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PD가 제 할 일을 못하면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드는 촬영본으로 편집해야 할 수도 있고(내용, 구도 상에서), 퀄리티가 수준 이하인 제작물을 어쩔 수 없이 송출해야 할 수도 있다. 그의 제작물을 내가 고쳐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는 실제 수면 시간을 줄게 만든다. 실제로, 요즘 잘 나가는 프로그램의 메인 PD가 다른 연출이 편집한 결과를 믿지 못해 직접 다 손을 댄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1차 편집본에 대해 2차적으로 수정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야말로 비효율의 굴레다.
잘하는 PD를 섭외하는 건 그래서 무척 중요하다.
내부 PD(방송사 소속 연출자)들은 잘하는 연출진을 옆에 계속해서 두고 싶어 한다. 다음 프로그램도 같이 하자고 꼬시고, 본인 프로그램을 안 하고 있을 경우 다른 내부 PD에게 소개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하는 PD들은 일이 끊이질 않고, 방송사 정규직처럼 내부에서 ‘붙들어진’ 상태로 나오지 않는다. 제작 산업이 노동 강도가 빡세다 보니 신입 공급이 적고, PD들이 유튜브 프로그램으로도 많이 빠져 잘하는 사람 구하기는 더더욱 하늘의 별따기가 된 상황이다. 그렇기에 잘하는 PD들은 큰 방송사, 진짜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고른다. 결국 좋은 사람을 얻으려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치다.
제작 업무를 하며 만나는 빌런들은 빌런의 유형에 따라 어떤 스트레스를 줄지가 조금씩 다르다. 연예인은 정서적으로, 작가나 연출진은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준다. 이 글은 그런 포인트에서 쓰였다. 해당 직종이 하는 일을 모두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이끄는 수장에게 어떤 식으로 ’스트레스‘ 줄지에 대해서만. 그것도 아주 일부분에 대해서.
다른 직업군에서도 일잘러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뉠 것이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이 몰리는 제작 환경에서는 ‘못한다’의 기준이 정말 기상천외한 수준이다. 메일 보내는 업무도 못하는 팀원을 만나본 적도 있고, 어제까지 일하다 오늘 사라진 팀원을 본 적도 있다. 다른 스트레스지만, 자기 룸사롱에 간 이야기를 떠벌이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PD는 최고의 콘텐츠를 위해 이러한 사람들을 목격할 때도 한쪽 눈을 감고 일을 한다.
팀원들과의 관계도 좋게 유지하면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도록 지휘하는 제작자는 그래서 대단하다.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을 다룰 줄 아는 멘탈을 가졌거나, 더 좋은 사람들만 골라 만나는 ‘실력’을 갖춘 것이란 뜻이니까. 매일매일 양질의 잠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능력을 발톱만큼이라도 배워야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