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 우돌 캐나다 영주권과 취업 도전기
8월 1일 무사히 랜딩 인터뷰(Landing Interview)를 마치고 난 즐거운 마음으로 캔모어로 돌아왔다. 이 기쁜 소식은 당연히 한국에 계신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들과 나누었고 다들 축하에 축하를 해 주었다. 아~ 이 순간이 되도록 1년 넘게 죽을 각오로 노력해 온 결과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 나는 너무 기뻤고 처음 시작 후 2주, 작년 9월에 그만 두려고 했었던 좌절의 순간들을 잘 이기고 꾹 참고 견디었기에 이 순간까지 왔지 않았나 싶다.
이 기쁜 소식은 그런데 1년이 넘게 일해왔던 음식점 사장님, 사모님께는 바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왜냐구? 영주권을 받으면 그만두고 가려고 할 것을 당연히 눈치로 아실 것이고 주방에 일하는 사람들이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내가 그만두고 빠져 버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따라서, 고용주들은 오랫동안 같이 일해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시겠지만 속마음은 그렇게 기쁘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영주권 카드를 받고 나면 고용주께 말씀드리고 한달 정도 여유를 두고 퇴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2주 정도 미리 Notice를 주는 것이 보통 기본적인 프로세스 이나 영주권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좀 더 일하는 것 같다.
인터뷰 때 IRCC 담당자 왈, "지금부터 2주 안에 영주권 카드가 메일링 주소로 배달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주공사 직원과 같이 인터뷰 할 때 메일링 주소를 이주공사로 해 뒀기에 더블 체크를 하고 2주 내로 배달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권 카드가 담긴 소포나 메일이 숙소나 음식점으로 배달 될 경우, 고용주에게 영주권 카드를 수령한 것을 들키게 될 것이고 나 또한 그것이 싫어 이주공사 주소로 배달되도록 재차 확인 후 인터뷰를 끝낸 것이었다. 8월 1일 이후로 거의 매일 이주공사에 카드가 도착했는지 문의를 하였고 애타게 카드가 도착되기를 기다렸다. 영주권 카드가 없으면 Landing Interview를 무사히 끝내고 임시 영주권을 받더라도 외국에 나갔다 들어올 때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카드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8월 14일이 넘었는데도 나의 카드는 이주공사 메일함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서서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 사모님께 숙소 메일함에 뭐가 왔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숙소 메일함은 매일 체크를 하지 않으시기에 편지나 우편물이 도착하더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도착 여부를 매일 알 수가 없었다. 숙소는 식당 사장님이 렌트하여 직원들이 Sub Lease 하는 개념이라 우편함 키도 직원들이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사모님이 우편함을 열어보시더니 몇 개의 편지를 가지고 오셨다. 모두 나한테 온 편지였었다. 나는 당연히 영주권 카드는 이주공사로 갔을 것이기 때문에 별 의심치 않고 숙소로 돌아와 메일을 뜯기 시작하였다. 약간은 묵직한 편지를 뜯는 순간 종이에 이면테이프로 붙여져 있는 영주권 카드를 발견한 것이었다.
"뜨악, 아니 이 카드가 왜 이리로 배달된 것이야?" 나는 뛰는 가슴을 가라 앉히고 카드를 구석부터 눈이 뚫어지게 보았다. 역시나 영주권 카드가 맞았던 것이다. 헐~
카드를 받고 나서 자세히 보니 운전면허증 같이 생겼으나 카피가 불가하게 여러군데에 신경써서 만든 것 같았다. 만기일이 2024년 8월 2일로 되어 있었고 5년간의 유효기간이 주어졌다. 영주권을 유지하려면 캐나다에서 최소한 50% 이상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영주권을 받은 이상 한국에서 그리 오래 머무를 일이 없겠지?
그런데, 인터뷰 할 때 하는 프로세싱 중 메일 주소 확인은 기본이라 더블체크까지 해 놓고서는 실제 카드는 본인 주소로 배달된 것이다. 이 사실을 이주공사로 알렸더니, 자기들도 이런 경우가 빈번해서 어이가 없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란다~ 선진국인데 일 처리하는 것은 후진국 같기도 하고 2주 안에 배달된다고 하였는데 그건 지킨 것 봐서는 약속은 꼭 지키는 공무원들이긴 한데..... 아무튼 살짝 씁쓸했다....
영주권을 받은 선배(?)들은 하나같이 얘기해 준다. 영주권 받으면 받은 한달간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즐거운데 그 이후에는 먹고 살 걱정으로 영주권 취득한 기억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간다는 것이고, 이까짓거 카드가 뭐길래? 하고 생각하게 된단다. 나도 그렇게 되겠지? 하하
영주권을 받은 기쁨을 가지고 일을하니 일도 즐거웠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기에 그 날도 기다려졌다.
그러나, 무릎 수술을 받았던 왼쪽 무릎과 오른쪽 무릎이 매일 일할 때 마다 아팠었고, 수술을 했던 왼쪽 무릎에 박혀 있었던 핀은 1년 전에 제거했었어야 했으나 캐나다에 오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었다. 1년이 더 지나니 핀이 박혀 있는 무릎이 가끔 쑤시고 아팠었다. 더군다나, 5년 전에 다른 검사 차 받았던 혈액검사 때 내과 의사가 하는 말이 혈소판감소증이 있다고 하셨다. 혈소판 감소증은 원인도 없고 특별히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도 없다고 하셨다. 보통 사람의 혈소판 수치는 15만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나의 혈소판 수치는 8만 정도라고 하셨다.
사실 8만 정도이면 생활하는 데 문제도 없고 수술 받고 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으나 수치가 2만개 밑으로 떨어지면 가만 있어도 피가 멈추지 않고 내장 등에도 피가 나온다고 하였다.
캐나다는 의료비가 모두 무상이고(암수술을 받아도 무상), 의료보험비 조차 한푼도 내지 않는다. 물론 BC주는 적으나마 매달 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 동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틈틈히 패밀리 닥터를 만나고 혈액 검사를 하여 수치 변화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스트레스가 극도였던 작년 9월 경에는 한 때 5만3천 개 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 경험상 이 수치는 몸이 피로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캐나다에서는 Special Doctor도 만나서 매달 체크를 하였으며 치수는 7만개 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 오기 전에 대학병원 의사와의 체크도 하지 못하고 온 터라 한국에서 하루 빨리 의사 면담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주권 카드를 받은 날짜가 8월 14일이었는데, 영주권 인터뷰 받은 사실을 사장님, 사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기에 마음 한 켠에서는 죄송한 마음도 들었기에 8월 9일 날 솔직히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 사모님 저 랜딩 인터뷰했고 이제 카드만 받으면 돼요!"
두 분 다 축하해주셨고 작년 6월 이후부터 1년 넘게 고생 많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곧 이어진 나의 말에 두 분은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나는 두 분께 말씀드렸다.
"수술 받았던 무릎이 아파 그 동안 하루 13시간 가까이 서서 일하면서 많이 아팠었고, 혈소판감소증도 앓고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식당이 바쁘고 제가 빠지면 힘드시겠지만 9월 첫째주 일요일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 말씀 드린 날짜가 8월 9일이었으니 한 달도 남지 않은 퇴사 Notice에 두 분께서는 무척이나 섭섭하셨나보다. 나이 많은 나를 고용한 것 부터 시작해서 거의 매일 같이 한식 식사를 제공해 주셨고 아프거나 하면 늘 신경 써 주신 형님, 누나와 같은 분이셨고 두 분도 동생 같이 잘 대해 주셨다고 생각하셨는데 그만둔다고 하니 괘씸하게 생각하셨나 보다. 내가 몸이 아파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는 사실도 그만 두는 사유로 말씀드렸음에도 그런 사유는 귀에도 들어오질 않으셨던가 보다.
사장님은
"당장 그만둬! 어떻게 어제 인터뷰 한 ㄴ이 오늘 그만두겠다고 날짜를 통보해?"
라고 심하게 말씀하셨고 사모님도 그동안 보이셨던 표정과는 달리 매우 화를 내셨다.
나는 그 자리가 너무 불편하여 자리를 피했고 쉬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레스토랑으로 복귀가 싫었다. 2시간이 흘렀을까? 내 마음 속에 "나를 영주권까지 받게 해 주셨고 지금까지 잘 보살펴 주셨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사장님께 면담을 조용히 요청드렸고, 나의 사정을 다시 조곤조곤 말씀드렸고 결국엔 9월 15일(일요일)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잠시 후 눈물까지 흘리셨던 사모님을 모시고 면담을 가졌고 오해가 있었음을 알게 되시었고 서로 좋게 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면담도 무사히 끝났다. 이제 정말 후련하고 모든 것이 한달 후 9월 15일이면 끝나는 거였다.
군대에서 병장 말년이면 제대할 때까지 하루하루는 정말 길었던 기억이 났지만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캔모어 레스토랑에서의 말년은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