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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Sep 22. 2024

완벽주의와 인정욕구라니

아들의 발음 치료 첫 상담에서 내가 울컥한 이유 


아들의 발음 치료를 결정하고 실비 청구가 된다는 가까운 센터에 상담을 예약했다. 다행히도 아이 아빠가 한국에 있는 날이라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출동할 수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라 아이도 우리도 긴장을 많이 했다. 선호는 그날 유치원 담임선생님께 많이 긴장된다는 이야기까지 했단다. 



센터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따뜻하게 선호 이름을 말해주며 맞이하는 선생님들 덕분에 아이는 바로 무장해제 상태가 되었다. 여전히 긴장 상태인 건 나와 선호아빠뿐이었다. 




상담실로 들어가니 센터장님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차 장난감들을 한 바구니 가져오셨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선호에게 이것저것 물으시며 함께 놀아 주셨다. 20분쯤 지났을까 대화는 끝이 났고 센터장님은 선호를 아빠와 함께 옆 놀이방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나와 센터장님 둘만 마주 앉았다. 센터장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뭘까. 선호는 어떤 상태라고 말하실까. 나의 긴장 레벨도 최고조로 달했다. 



"어머님, 선호 발음은 그렇게 걱정하실 상태는 아니에요. 

 한 세 달 조음 교육 받으빠르게 좋아질 거고요." 



실제로 선호의 발음은 조음 검사를 권유받았을 때보다 상당히 많이 좋아졌었다. 나뿐만 아니라 처음 검사를 제안하셨던 담임선생님까지 모두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센터장님의 첫 말씀은 좋은 시그널이었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마음이 턱 무너져 버렸다. 정말 문자 그대로 마음이 턱. 




"아이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네요. 

 그래서 말도 늦게 시작했을 거예요. 자기가 못하는 거 아니까, 잘 될 때까지 안 했을 거예요. 

 아이가 갖고 있는 자기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을 거예요. 그래서 자기비판도 많을 거예요.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 같은. 

 그런데 선호 같은 경우는 관계도 중요한 아이라 인정욕구도 강하고요. 

 친한 친구 이름을 크게 말하는 거 보니 교우관계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마 학습적인 측면에서는 약간의 선행 학습이 크게 도움이 될 스타일의 아이예요.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면  수업시간에 엄청 집중하고 날아다닐 스타일이죠. 승부욕도 많을 거고요.

 근데 못한다 생각하면 시작도 안 할 거예요." 



주어를 선호에서 나로 바꿔도 될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



나는 완벽주의가 내 최대 단점이자 약점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인정 욕구가 높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나를 계속 채찍질하는 나다. 나에 대한 기대 수준도 높고,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는 초등학교 6학년 방학 두 달 동안 다녔던 예비 중 1 선행 학원에서의 시간이었다. 엄청 힘들기로 유명한 학원이었는데 난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왜 좋았는지 생각해 보니, 내가 경험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행이어서였나 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표정이 어두웠는지, 센터장님은 바로 이 멘트를 덧붙이셨다. 



"완벽주의가 나쁜 의미로만 이해되는데, 아니에요. 어머님. 성취 목표가 높다는 것이고, 이런 친구들이 결국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아요. 성적이 좋은 경우도 많구요. 완벽주의에 관계성도 중요한 아이니까 리더가 될 스타일이에요."



솔직히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나와 달리, 막 살길 바랬다. 공부를 못해도, 명문대를 안가도 괜찮다 생각했다. 마음 가는 대로 쉽게 해 보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길 바랬다. 그래서 실수도 실패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도전하며 살자고 말해줬었는데, 웬걸. 기질이 나와 똑 닮았단다. 



 "어머님, 선호가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지금 자기 발음에 문제가 있어서 여기 온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어머님이 선호에게 해주실 건, 네 나이에는 여기 오는 게 당연한 거라고 덤덤하게 말 해주시는 거예요."



마지막 멘트까지 덜컥했다. 맞다. 선호는 눈치가 빠르다. 



_



아이가 잠든 뒤에야 남편에게 내가 들은 이 이야기를 전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나에 비해 감정의 요동이 적은 남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는 말했다. 


"그럼 그에 맞춰서 또 해보자."



-



선호의 성향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한동안 속상했다. 따지고 보니 이것도 끝없는 자가검열이자 자기비판인 것 같아 집어치우기로 했다. 



이제는 안다. 

.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빨리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건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라는 걸. 

. 선호의 기질, 혹은 성격이 나를 닮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걸 해봐야 한다는 걸.

. 웬만해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오늘도 공부를 하고 아이에게 적용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기찬이 말이 맞다. "그럼, 그에 맞춰서 또 해보자." 



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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