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세상은 수학처럼 명확하게 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한때는 나 또한 명확한 것을 선호했다.’고 말하며, 이젠 그 한계를 알고 ‘애매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자란 나’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러나 진짜 나를 숨기고, 내 모습을 꾸며대는 동안 마감 기한은 한참 지났고 결국 나는 시간에 굴복하여 진짜 내 모습에 관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아이처럼 실수하는 내 철없음에 관한 글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명확한 답을 좋아했다. Yes or No 중에 Maybe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모호하게 싫어할 바엔 차라리 왕창 사랑 해버렸고 상처받을 때도 처절하게 아픈 길을 택했다. 불어오는 잔바람에 이는 생채기는 상처로 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첫 번째, 확실해야 다음 단계(그것이 감정의 변화든, 상황의 변화든)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 은은하게 오래 아픈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다.
내게는 누군가와 이별할 때 꼭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주고받는 습성이 있다. 내 마음이 어땠고, 어떤 점이 고마웠는지, 미안했는지, 모두 말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뒤돌아섰다. 이 또한 명확함을 쫓는 내 성향과 똑 닮아있는데, 지금껏 이 방식을 고수해온 데에는 이 방법이 꽤 잘 먹혀온 탓도 있었다. 마음껏 사랑해버리고 이별할 때 처절하게 힘들어했다. 대개 후폭풍은 상대방의 몫이었다.
그러다 A를 만났다. 대체로 무표정의 A는 자신은 본래 잘 웃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종종 크게 웃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말을 하다가도 ‘음….’하고 잠시 멈추어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런 신중함이 좋았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많이 움직였다. 좋으면 어디서든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깊은 얘기를 꺼낼 때 눈을 바라보느라 정지되었던 것만 빼면 나는 늘 그의 앞에서 동적이었다.
그는 ‘아마..’, ‘생각 중이야.’, ‘고민하고 있어’ 같은 애매한 답변을 선호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Maybe’를 견디지 못해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를 물으며 채근했다.
이별은 늘 그렇게 온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그에게 확답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우리가 어때? 좋아, 싫어?’
그날따라 술기운이 조금 돌아서인지, 잔잔했던 그가 울컥했다. ‘너는 꼭, 그렇게, 기어코 내가 거절하는 게 듣고 싶어?’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거절이 듣고 싶은 건 아닌데, 그렇게 확실히 거절당하지 않으면 내가 내 마음을 접기가 어려워서 그런 거였는데. 감정을 자주 살피며 자신을 정돈하던 그는 그날따라 한 번 울컥한 감정을 쉬이 가시지를 못했다.
그는 자신의 속도에 비해 내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했다. 난 늘 바로바로 답을 원하는데, 자기에게는 어느 정도의 잠잠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싶은데, 꼭 내 앞에 있으면 답을 바로 내놔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든다고 했다.
그를 잃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게 됐다. 인간은 참 어리석지. 꼭 잃어야 걸어온 자리를 돌아본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호함을 견뎌낸다는 것이 아닐까. 말과 말 사이에 띄어쓰기하는 것. 음표들 사이에 찍힌 쉼표에서 정말 쉬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애매모호한 우리 사이를 도무지 견디지 못해서 “음악 뭐 좋아하세요?”라는 상대의 질문에 “저는 오빠를 좋아해요” 따위의 말을 뱉어 버리고, 적당한 밀고 당기기로 상대를 긴가민가하게 하기보다 좋으면 너무 좋고 싫으면 너무 싫다고 표현하며 내 패를 쉽게 까버리는 어른 세계 속 겉돌이 같은 존재가 나다. 이 글의 결론이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것을 어느 자리에서 잃어버렸는지 돌아온 길을 다시 복기하며, 성급히 걸어온 자리를 다시 천천히,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갈 뿐이다. 언젠가 도착한 그곳엔 어른이 된 내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