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외향적)도 I(내성적)로 바뀌는 타국에서의 직장생활
타고난 성질이 내성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땐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게 되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접어 눈에 띄지 않고 싶었다. 행여나 대화의 소재가 내가 될 때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무슨 자신감이 생겼는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가운데 서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고, 외향적 성격이 힘을 쭉 받아 직장 생활에까지 이어지고, 술자리, 사교모임, 회식은 즐거운 마음으로 빠지지 않곤 했다(ft. 남편의 외조와 이모님? ^^). 한국에서의 마지막 MBTI는 분명한 "E (Extrovert)"였다.
앞 글에서 소개한 대로 어찌어찌 운 좋게 새로운 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기본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담당하게 되는 나라도 다르고 Western Europe 팀에서 운영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어 마치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팀은 태생적으로 버츄얼 팀이라 12개의 나라에 흩어져 있는데, 이제 막 새로운 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할 무렵 코로나가 시작되어 안타깝게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같은 팀원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그동안에는 간간히 출장도 있었을 테고, 속해 있는 나라에서 같이 일하는 팀들과의 대면 업무도 많았을 텐데 코로나 상황에서 내가 만난 팀원들은 모두 Teams의 사각 스크린에 보이는 상반신의 모습이 전부다.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해 볼 기회가 있었다면 처음 일 년간 적응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부산물이다.
팀 미팅에서 시답잖은 농담이 없는 것도 신기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친절하고 다정해서 미팅이 끝나고 나면 오글거리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왓츠앱에 단톡방에서의 대화는 특히나 더 다정했다. 어떤 동료가 주말에 멋진 호수나 산에 가서 본인 아이들 노는 동영상을 공유하면 그에 대한 스위트 한 답글들이 주르륵 올라오는데 정말이지 나로서는 돈이나 받아야 할 수 있는 좋은 말들이 가득이었다. 처음엔 나도 몇 마디 달다가 어느 순간 댓글을 안 달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서로에게 좋은 말 해 주고 친절한 게 나쁜 일은 아니고 오히려 너무도 바람직한 일일 텐데, 나의 개인적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한국 직장에서는 이런 너무도 대놓고 친절하거나 좋은 말을 해 주는 게 좀 낯 간지러운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다. 누가 칭찬을 해도 과하게 해 주면 쟤 왜 저래 싶은..
처음 혼자서 낑낑대며 내가 정말 모지리인가 싶게 만든 건 벨기에의 나보다 열 살 어린 동료(E라고 하자)와 함께 일하면서였다(이곳에서 나이는 대놓고 물어보는 게 아닌지라 대충 아이 나이나 경력으로 유추해 보는데 E가 어느 시점에 자기는 몇 년도 생이라고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E는 우리가 함께 한 프로젝트를 이미 일 년 정도 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고, 뒤늦게 내가 합류하게 돼서 나는 일단 함께 해 보면서 상황 파악을 해야겠다 싶어 많은 부분에서 E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자 했다.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이 일을 더 오래 한 사람을 존중해 준다는 느낌으로. 그런데 처음 프로젝트에 합류하고 얼마 안돼서 나를 소개할 때 이메일에 E를 이 프로젝트에서 서포트한다는 말을 썼다가 바로 지적당했다 (+매니저한테도 ㅠㅠ). 우리가 co-leading 하고 있는 거지 네가 나를 서포트하는 게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매우 지당한 말이다. 나의 마음자세가 틀렸다. 이건 인정.
E는 리더들 커뮤니케이션도 잘하고 세션을 할 때 스피커들과 진행을 잘한다(물론 영어도 잘한다). E가 매니저들에게 보낼 메일을 작성한 걸 나에게 공유해서 피드백을 달라고 보내줬는데, 좋은 말 대잔치라 '본론만 간단히'라는 내 스타일로는 다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이것 역시 E가 잘 알아서 했겠지 싶고 뭐 대세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깐 좋다고 하면서 답을 했다. 세션 준비에 앞서 임원분들에게 "이런 포인트로 이야기해 주고, 우리가 하려는 게 이런 거고"라는 미팅을 종종 진행하여야 하는데, 초반에 난 그분들의 직급에 벌써 눌려서 자신감이 반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참여했다. 처음 몇 개의 미팅에서 원래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 보고 배워야겠다는 자세로 E가 미팅을 이끌도록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내가 뭐 놓친 거 있니?"라는 식으로 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 외에는 내가 딱히 끼어들 자리가 없는 미팅이 되어 버리곤 했다. (이렇게 글로 적어 뒤돌아보다 보니 E를 오해하고 살짝 원망했던 내가 한심할 지경이다. 미안...) 난 굳이 왜 미팅에 들어간 거지?라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할 무렵, E도 문제를 인식하고 서로에 대해 더 이해해 보는 미팅을 하자며 미팅에 초대를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협업을 잘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난 문제가 있다는 점은 알았지만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분명 내가 일을 못하는 바보는 아닌데 ㅠㅠ) 어떻게 하면 함께 더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별로 없었다. 단지 속으로 네가 미팅을 독차지하지 말고 나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되잖아라는 원망만 했고 이것을 어떻게 프로페셔널하게 이야기해야 할지는 잘 몰랐던 거 같다. 우리는 Insights Discovery라는 성격검사 분석 지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몇 번 더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Culture map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문화적인 차이가 많은 오해를 만들고 협업을 방해하는지 그리고 내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했다(Culature Map의 많은 에피소드 중에 딱 나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중국인과 미국인의 협업 에피소드가 나온다. 완전 유레카!). 이후 E와 나는 몇 가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의견을 더 나누었고, E는 내가 리딩 할 수 있는 기회를 일부러라도 더 만들고, 나는 나대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하는 식으로 합의를 했고, 이후 우리가 이끈 프로젝트로 작지만 의미 있는 상도 받았다. E는 이후 출산/육아 휴직을 들어갔고, 나는 이 프로젝트의 경험자가 되어 이탈리아의 새로운 동료 C를 맞이하여 2021년에도 계속 이어갔다. 파트너가 바뀌고 속으로 끙끙댔던, 심지어 가끔 억울하고 속상해서 눈물도 흘렸던 아픈 경험을 배움으로 삼아 초반에 아예 톡 터놓고 이야기했다. "내가 자란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겸손이 미덕이야, 그래서 상대방 의견을 많이 존중하려는 습관이 배어 있다 보니 내가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내가 이 일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같이 잘 일할 수 있게 너의 도움이 필요해."라고.
코로나 상황에서 만나는 건 가족이 전부요, 재택근무 외에 짬짬이 하는 것이라곤 동네 마트 가는 것과 개 산책, 그리고 숲 걷기이다 보니 점점 더 내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예전 외향적인 삶이 그립기도 한데, 며칠 전 매니저가 피드백을 주면서 나의 내성적인 것을 이야기했다. 젠장, 난 이제 빼박 내성적 인간인 건가. 아마도 외향성과 내향성을 둘 다 갖고 있는 양향 성격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이런 규정 따위. 나는 나대로 나에게 맞는 삶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