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시댁을 다녀오며 아이에게 줄 봉숭아꽃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이가 거절해서 둘만 들인 거긴 하지만, 동생과 조카만 봉숭아 꽃물을 들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이런 이모의 정성이 야속하게도, 아이는 도리질을 치며 '다음에' 하겠다고 계속 거절을 했다.
결국 동생은 더 기다리면 시들 것 같다며 내게 봉숭아 이파리와 꽃이 잔뜩 들어있는 비닐봉지와 백반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도전!
아이의 손톱과 발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기로 했다.
문구점에서 파는 손톱에 바르는 걸로는 해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재래식(?)으로는 처음이라 아이도 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다.
절구도, 공이도 없어서 적당한 그릇과 나무 뒤집개로 아이와 번갈아가며 봉숭아 이파리와 꽃잎을 찧었다.
아이와 함께 재미있다고 키득거리며, 비닐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놓고, 테이프도 준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손재주 없는 엄마의 허리는 어느새 지끈지끈하기 시작했다.
손톱만 할까? 꼬드겨보았지만 아이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발톱까지 하고 싶다고 했다.
잠든 아이의 발톱까지 다 해주고 나니 너무 지쳐버려서, 함께 물들이고자 했던 내 발톱은 포기하기로 했다.
정리하며 보니 내 손가락에도 어느새 예쁘게 물이 들어 있었다.
어쨌든 미션 완수.
다음 날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풀어보니 내 기대만큼 진하고 고르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예쁘게 물이 들었다. 아이는 마냥 행복해했다.
나는 아이 하나 해주고서도 이렇게 힘이 든데, 엄마는 어떻게 두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매년 예쁘게 물을 들여주셨을까. 내 기억 속에는 힘듦이 전혀 없는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뿐인 봉숭아 꽃물 들이기가 이렇게 허리 아프고 손 끝이 떨리는 일일 줄은 몰랐다.
비닐을 차곡차곡 잘라 놓던 기억.
실을 같은 길이로 잘라 가지런히 놓던 기억.
어제처럼 생생한, 20년도 훌쩍 넘은 그 기억이 참 많이 그리웠다.
곱게 물든 아이의 손과 발의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예쁘다. 옛날에 누구는 손톱 옆 피부에도 물들었다고 땡깡부렸는데 ㅎㅎ"
아이의 손을 보니, 피부에도 꽤 많이 물이 들었다. 하지만 무던한 아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색이 곱다고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땡깡을 부렸었나. 사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 스스로를 알기에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땡깡을 부렸다면, 그다음 해 허리 아프고 힘이 든 봉숭아 꽃물 들이기를 건너뛸 만도 한데, 엄마는 사춘기가 되어 안 하겠다고 할 때까지 매년 여름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다. 이제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을 때, 엄마가 왠지 모르게 서운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 다시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흔쾌히 다시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다.
그러고 보면 내 기억 속의 나는 꽤 까탈스러운 아이였던 것 같다. 밥 먹는 것도,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것도, 하다못해 머리를 묶는 것 까지, 무난한 아이는 아니었다.
"꼭 너 같은 아이를 낳아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 이야기를 엄마 역시 내게 종종 하셨었다. 그렇지만 출산 날이 가까워오자 엄마의 말이 바뀌었다.
"우리 설이가 다 좋긴 한데, 그래도 성격은 설이 보다는 설이 남편을 닮았으면 좋겠다."
내 성격이 어때서 그러냐는 말에 엄마는 너보단 네 남편이 좀 더 무던한 성격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며 어색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나보다는 아이 아빠를 좀 더 닮아 순한 편이다.
흔히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효자, 효녀가 된다고 한다. 그런 게 어딨어, 하던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나와 엄마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울컥하고, 마음 한켠이 알싸하게 아파오는 날들이 생기고 있다. 아주 사소한 기억에도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고, 정말 소소한 추억에도 나는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이에게는 미안한, 엄마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똥손의 흔적.jpg
이 작은 고사리 손이 내 손보다 커지는 날이 오면, 이 아이 역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