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을 때
그런 날이 있다. 평소에 늘 그 자리에 놓아 두던 물건이 유독 눈에 띄는 날. 그 물건의 존재가 평소와 달리 강렬하게 느껴 질 때가 있는데 이유는 모른다. 그날도 일년 넘게 먼지 쌓인 채 방치 해두던 카세트 테이프 하나가 번뜩 하고 갑자기 내 눈에 들었다. 필시 업무 보고서를 마무리 짓기 싫었던 탓이리. 책상을 덮어둔 면보의 체크 줄눈 수를 세는 것과 같이 딴 짓 하다가 거기 까지 손이 뻗친 거겠지. 그래도 이런 딴 짓의 순간은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해주는 순기능도 있다.
갑자기 눈에 들은 그 것은 다이나믹 듀오 1집 테이프였다. 기회가 닿아 다이나믹 듀오로부터 직접 친필 사인을 받았던 앨범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희열이 무색하게 없어져도 모를 만큼 무신경히 지내온 세월이 얼마였던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최고로 꼽는 앨범 중 하나였는대도 말이다. 대한민국 힙합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드렁큰 타이거가 수장으로 있던 <무브먼트>크루 중 하나가 다이나믹 듀오 였다. 당연히 그 크루 출신이 낸 앨범이라는 자체부터 내게는 초미의 관심사 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이나믹 듀오와 비슷한 시기에 부가킹즈라던가 에픽하이, 리쌍, 은지원 등이 낸 앨범들도 같은 이유로 나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다이나믹 듀오의 1집 <택시드라이버>가 유독 특별했던 이유가 있었다.
택시드라이버라는 앨범 타이틀에 잘 어울리는 SKIT들이 그 것 이었다. SKIT이 앨범의 흐름 상 분위기를 환기 시키는 용도로 삽입 된다. 그러나 그 이 전까지의 SKIT은 내가 아는 선에서는 대부분이 다음에 나올 곡의 전주 역할을 하는게 대다수 였다. 택시 드라이버는 총 4개의 SKIT으로 구성 되어 있고 그 중 3개가 택시 운전자와 승객의 흥미로운 대화로 이어지며 다른 수록곡과는 별도로 전개를 가진다. 이 당시 MTV의 리포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DR.노(노홍철)가 택시기사 역을 맡았는데 그의 수다스러운 톤이 이 역할에 잘 녹아 들어있다. 택시 드라이버의 SKIT들은 흔히 말하는 밑밥의 수준의 전주를 넘어 잘 짜여진 연극과 같았다. 한 편의 서사인 셈이었다. 오죽하면 SKIT에 나오는 대사도 줄줄이 외고 다녔을까.
드렁큰 타이거의 5집이나 EMNEM의 The Slim Shady LP앨범도 비슷한 맥락으로 좋아한다. 드렁큰 타이거 5집 <하나하면 너와 나>에 수록된 SKIT의 수량 자체는 적다. 그러나 5000원을 부르짓는 그 유명한 연습생의 애환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The Slim Shady LP의 SKIT은 다소 여성 혐오적일 수 있으나 어린 시절 엄마에게 상처받은 본인의 기억을 담아 각 SKIT에서 본인의 한을 풀어 놓았다.
SKIT들이 긴밀한 서사나 스토리를 지니고 있어야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주처럼 짙게 깔리며 다음곡의 반주를 자처 하는 SKIT들은 쉼표가 없다. SKIT에서 자연스레 다음 곡으로 넘어 가지만 앨범 전체를 단숨에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서사가 깃든 SKIT의 스타일은 한 템포 쉬어 가거나 앨범 중간에 다시금 전곡을 생각 해 볼 여유를 준다는 점에서 좀더 나의 선호도를 얻은 것이다. 빌드업이 아닌 환기용으로 짬짬이 쓰인 SKIT들은 자칫 너무 무겁게 흘러갈 수 있는 앨범 분위기를 한 단계 낮춰 주는 것 같아 좋아하는 편이다.
어쨌든 간만에 눈에 든 <택시드라이버> 덕분에 지난 며칠간 나의 드라이브 송은 당연히 <택시드라이버> 였다. 운전하는 내내 DR.노의 미숙이 타령을 들으며 각기 인생에서 휴식의 순간도 어쩌면 SKIT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의 메인 역할이 있다면 그 역할을 잠시 내려 놓는 순간이 각자의 SKIT이라고 보자. 그럼 이 SKIT을 쉼 없이 메인 캐릭터를 발전 시키기 위한 용도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메인 캐릭터는 아예 접어두고 업무와는 상관없는 부캐를 꺼내들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는 나의 철학처럼 별 상관 없는, 딴 짓 하는 SKIT들을 나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