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음을 버리는 자유

by 낯선은하



회식 자리에서 쏘맥을 먹다 술기운에 기대 이야기했다. 내가 낳을 아기를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이미 부모가 된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답했다. 누군가는 그 순간이 오면 당연히 사랑하게 될 것이라 했고, 누군가는 어느 정도의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가 삶의 고비를 넘기기 전까지 밤낮을 눈물로 보내며 기도했지만, 정작 아이가 집에 온 첫날밤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해 아기의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순간들을 넘기려는 노력을 하며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거랬다.


여전히 나는 확신이 없다. 어릴 적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죽었단다. 죽기 직전까지도 끝끝내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그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는 변할 수 없다. 정말 끝났다.


이제는 기다릴 것이 없다.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다, 라고 간단하게 마무리지으면 될까. 하지만 탐탁지 않다. 만약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나는 나쁜 사람의 절반을 물려받은 사람이 되는 걸까? 배가 아플 때마다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너 장이 예민한 거 네 아버지 닮아서 그래." 그런 걸 물려받았구나. 그런데 그런 것 외에 나는 또 무엇을 물려받은 걸까? 단순한 체질뿐만 아니라 내 성격과 사고방식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이제는 도망치고 싶어질 때마다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무책임함을 물려받은 건가? 나의 결말도 그와 다를 것이 없으려나? 그러다 결국 그의 유전자를 탓하며 모든 것을 합리화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내 아이를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서, 그와 다른 사람으로 나를 정의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답해야 하는 의문들이 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과연 얼마나 그의 영향을 받은 걸까? 부와 모를 재조립한 복제품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서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복제 인간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얼마 전에 「미키 17」이라는 영화를 봤다. 미키는 'expendable', 즉 소모되기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이다. 기억은 저장 장치에 기록하고, 육신은 계속해서 새로 뽑아내는데, 기존에 저장해둔 기억을 새로운 육신에 주입하며 존재를 이어간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두 명의 미키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서, 주인공 미키 17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이전까진 죽어도 다음 미키가 자신을 이어갈 것이란 확신이 있었지만, 더 이상 기억이 저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 삶은 오직 자신만의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바로 그 자각이 다른 미키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봉준호, 『미키17』, 워너브라더스, 2025년


'나'를 정의하는 변치 않는 본질이 있는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는 '기억'이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기억은 지나간 것이고, 지나간 것은 낡은 것이며, 나는 언제나 현재에 서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거다.


"당신은 어제 당신에게 무언가 가르쳐준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이 가르쳐준 것은 이내 새로운 권위가 된다. 그리고 어제의 그 권위는 천년 묵은 권위와 마찬가지로 파괴적이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제의 것이든 천년 묵은 것이든 어떤 권위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살아 있으며, 항상 움직이고 유동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 자신을 과거의 경험이나 특정한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순간 그것이 곧 나를 구속하는 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어떻게 관찰할까?


"나는 관계라는 틀 속에서만 내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삶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혼자 있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 사물들, 생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른 형태의 이해는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는 자기를 탐구할 수가 없다. 나는 추상적 실체가 아니다."


나는 강인한 엄마, 형제, 사려 깊은 애인, 친구, 동료들을 만나며 살아왔다. 내가 혼자였다면 다듬어지지 않았을 부분들이 깎이고 주물러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니 유전자만으로 나를 정의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일 뿐이다. 마치 공기의 저항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이의 낙하 운동을 계산하는 것처럼, 관계와 환경을 배제한 채 나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과도 연결된다. 나라는 존재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적으로도 인간의 세포는 몇 년을 주기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뀐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경험이 쌓여 나를 형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변질되고, 과거의 나는 점차 낯선 존재가 되어간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해왔다. 유전자가 나의 일부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나라는 존재는 관계와 경험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정의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지금 위에 서있다. 그 사실이 내게 평온을 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



현재는 과거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


며칠 전 동료와 「퀸스 갬빗」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가 강에 잠수한 채 나오지 않자, 그 모습을 보던 어린 베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동료가 말했다. 강하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자란 베스의 내면에는 여전히 약하고 불안한 모습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스콧 프랭크, 앨런 스콧 연출, 『퀸스 갬빗』, 넷플릭스, 2020년


나는 그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베스는 그러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으로 자란 거라고, 그리고 어린 베스의 유난한 모습은 그녀의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그녀가 처한 환경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모든 것은 '인과'라고.


어리고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어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어른이 단 ‘한 명’뿐이고 ‘여성’이라면, 엄마의 위태로움은 곧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 죽음의 공포를 피부로 느끼는 환경에서 자란다면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 된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언젠가 반드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냉소를 가지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강해지는 법을 익히고, 감정을 억누르고,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 '베스'로 자라난다.


나는 이 장면의 의도가 이토록 분명하게 느껴졌다. 왜일까.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의 굴곡을 겪어서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떨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부단히 노력했다. 말을 삼키고, 홀로 남을 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가 떠난 순간부터 이미 내 삶의 방향이 정해진 걸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격과 삶의 태도는 내가 선택한 것이 맞는가?



나는 정말 주체적으로 내 삶을 결정했는가?


AI에게 무의식을 묻는 것이 유행이란다. 나는 속는 셈 치고 AI에게 물어봤다.

"내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을 것 같아?"


아버지가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여성들과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이유를 물었다. (이미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에서부터 힌트를 얻었다고도 했다, 젠장.)


자립적이고, 논리적이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뛰어남.
아버지 없는 환경에서 자란 여성들은 보통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음.
인간관계에서 거리감을 둘 가능성이 있음.
아버지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려워할 수 있음.
자립심이 강한 사람들은 남에게 기대는 것을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이 같은 결핍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나의 자유 의지로 살아온 걸까? 내가 내린 결정들이 사실은 그가 떠나던 어느 밤, 이미 예언처럼 쓰여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순간 나는 무대 위 줄에 매달린 인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대에 오른 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지인 모임에서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했다. 나는 살면서 내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나를 해석할 것이다. 단편적인 정보로 나를 짐작하고 결론을 내려버릴 게 뻔한데 굳이 나를 내보일 이유가 있을까? (웃기는 점은 그런 일이 일어난 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세상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 자체가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이라면?'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완전히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모임이 마무리될 무렵에 입을 뗐다. 나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결정해버린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던 선배가 말했다.


"성격이라는 건 개인의 삶을 예측하기 위한 통계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측이 돼. 예를 들어 과학고를 졸업하고 공대 나온 사람들의 특징은 대충 예상이 되잖아?"


나는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런데, 삶을 선고받았다는 말도 있지. 우리는 모두 어떤 무대 위로 불려 나와야 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관객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걸 토대로 이런저런 예측을 할 거야. 근데 무대 위의 우리는 여태까지 살아왔던 대로 해도 되고, 완전히 새롭게 해도 돼. 무대에 오른 순간 어떤 즉흥 연기를 펼칠지는 오로지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야."



과거로부터 걸어 올라왔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할지는 오로지 나의 자유…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 누군가 써둔 듯한 프롬프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나를 지레 판단하고 상처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엔 평온이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다는 감각이 찾아왔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가짜 수도승이 아니다. 사람들과 역동적으로 뒤섞이고, 그 속에서 나를 찾고, 때로는 TMI를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재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나는 대화를, 관계를, 불완전한 연결을 택한다. 사랑을 택한다. 그의 부재가 내 삶의 서사를 결정하게 두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나만의 무대 위에 선다. 사랑을 다시 정의할 자유, 그리고 나 자신을 써 내려갈 자유와 함께.



할 일:

고마운 사람들에게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