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책 읽는 재미를 막 알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집어 든 뮤지컬 평론집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림이 많아서 읽기 쉬워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처음으로 라이온킹 뮤지컬을 만났다. 책에는 "극장의 무대 위에 아프리카의 일출이 펼쳐진다"는 식의 문장이 있었다. 뮤지컬의 장관을 아프리카 초원에 빗댄 표현이었지만, 뮤지컬을 본 적도 아프리카에 가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그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의미를 모른 채 그저 흰 바탕의 검은 활자를 읽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문장 너머로 터져 나오던 저자의 벅찬 감정만큼은 생생하게 전해졌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어쩌면 내가 글 자체의 맛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뮤지컬의 본질은 같은 시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음악의 전율과 배우의 생생한 움직임에 있는데, 글에는 소리도 움직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느낀 것은 오로지 글이 전달해준 감동이다. 이를테면 흑백 요리사에서 백종원이 안대를 쓴 채 요리를 맛보고는 '쏸차이' 같은 낯선 용어를 읊으며 향과 식감을 묘사하는 장면 같은 것이다. 요리사가 끓인 그 요리도, 비슷한 맛이 난다는 쏸차이도 먹은 적 없기 때문에 그 맛을 전혀 알지는 못하지만,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음흉한 '표정'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나에게 라이온킹은 오랫동안 이런 쏸차이같은 존재였다.
나는 AI와 뉴욕 여행 동선을 짤 때, 라이온킹만큼은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라이온킹을 브로드웨이에서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화면으로만 보던 음식을 코끝으로 들이마시고, 한입 베어물며 혀끝으로 음미하는 순간처럼!
무대는 시작부터 압도적이었다. 라피키(Rafiki)가 그 유명한 "나주 평야 발바리 치와와"(실제 가사는 '사자가 나타났어요 아버지'를 뜻하는 "Nants ingonyama bagithi baba")를 외치자, 다른 동물들이 대뜸 관객석의 2층 구석과 1층 복도에서 등장하더니 노래를 이어받았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동물들은 점차 무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3미터를 훌쩍 넘는 기린이 느릿하게 걸어 들어오고, 가젤 무리는 일사불란한 군무를 추며 무대를 채웠다. 우리 옆을 지나간 거대한 코끼리 뒤로는 장난기 어린 아기 코끼리도 뒤따랐다. 치타의 섬세한 몸놀림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작품 같았다. 그리고 무대를 가득 메운 강렬한 태양…! 드디어 나는 평론집에서 말하던 “무대 위에 펼쳐진 아프리카의 일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흑백 활자 속에만 머물던 장면이 눈앞에서 붉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커튼콜은 더욱 특별했다. 25년간 라피키 역을 맡아온 배우, 츠이디 마녜(Tshidi Manye)가 라이온킹과 작별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실제로도 우리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동료들의 찬사를 끝으로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끝없는 박수를 보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25년 동안 한 배역을 유지한다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한 배우의 기량과 작품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동시에 다른 생각도 스친다. 그 긴 세월 동안 같은 배역을 지켜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브로드웨이 한복판에는 조금 다른 뮤지컬이 펼쳐지는 식당, Ellen’s Stardust Diner가 있다. 서빙을 하던 종업원들이 자기 차례가 되면 쟁반을 내려놓고 마이크를 잡는 곳이다. 가보자는 친구의 말에 무심코 그래! 라고 대답했다가 곧 죄책감이 끈적하게 올라왔다. 화려한 공연장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 폭 50cm 남짓한 단상을 무대라 부르며 무대 의상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노래해야 하는 삶은 조금 서글프지 않을까. 혹여 노래가 끝난 뒤에 그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그래서 그들의 초라한 퇴근 길이 머릿속에 그려질 때 나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있을까?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물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만 있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둬둔 이국의 동물들을 보기 위해 도심 속 동물원에 들렀던 나. 싸고 빠른 방식으로 즐거움을 얻은 뒤에야 느꼈던 그 찝찝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내 걱정을 듣던 친구가 담담히 말했다. “글쎄, 즐거워 보이던데?”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했고, 잠시 대기를 하다가 이내 안내받은 자리는 식당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등받이가 바로 무대였다는 사실은 조금 뒤에 알게 된다. 까만 피부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자신을 '매튜'라고 소개한다. 아뿔싸, 이름을 알아버렸다. 이제 그는 내 삶의 '행인 1'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가진 어엿한 등장인물이 되었다. 그의 눈에서 서글픔을 발견한다면, 나는 적어도 한 번은 그의 얼굴에 핀 조명을 쏘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독백의 순간에 매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음식을 나르던 매튜가 사라졌다. 매튜가 곧 노래할 차례인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매튜가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표정을 똑바로 보고 싶지만서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충분한지는 모르겠다. 노래를 시작한 그는, 아아 역시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 눈썹을 능청스럽게 씰룩거리더니? 자유자재로 목소리를 바꾸다가 이내 아주 느끼한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며, 주머니 속에 가득한 빨대를 장미꽃인 것 마냥 여성분들에게 날려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핀 조명에 드러날 표정의 주름진 그림자를, 아니 사실 내 날 것의 죄책감을 무서워했지만, 정작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만을 비출 스포트 라이트를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 매튜는 그 순간의 주인공이 되어 순식간에 모두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내 연기와 노래와 춤을 보라! 실컷 보라!
온몸으로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한 아이가 뮤지컬 “해밀턴”의 「You'll Be Back」을 있는 힘껏 따라 불렀다. 마치 서로에게 “넌 이 순간을 잊지 못해서 언젠가 돌아오고 말 거야“ 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직원과 손님들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그 순간을 함께했다. 언젠가 그들 중 몇 명은 진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설 것이다. 몇 명은 그러지 않을 테고. 하지만 이 평범한 식당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눈을 맞추고 웃음을 나누던 순간은 어떤 대극장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무대는 장소가 아니라, 꿈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배역을 25년간 성실하게 지켜낸 마녜에게 일어나 환호하듯, 좁은 단상에서 꿈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매튜의 반짝이는 순간에도 나는 같은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감히 이들을 불쌍히 여길 것인가. 그들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 마지않을 존재들이었다. 거대한 극장에 아프리카의 태양을 불러오듯, 평범한 음식점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무대로 바꿔놓을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건 꿈을 향해 성실하게,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었다.
노래가 끝난 뒤, 진행자가 무대에 올라와 외쳤다.
“지난달에만 두 명이 브로드웨이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이곳 출신의 배우들이 지금 브로드웨이에서 엘파바, 글린다 같은 주역으로 날고 있어요. 너무 자랑스럽죠. 여러분은 미래의 스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거예요!”
천장의 미러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짝 반짝 빛나는 그들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일렁이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나는 그저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