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인간의 법칙

AI와 인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by 낯선은하



나는 최근 6년간 만났던 사람과 이별했다. 웃기게도 그 순간에도 AI가 있었다! 상대는 AI와 밤새 대화를 나눈 끝에 이별을 하기로 결심했고, 나는 이별의 메시지를 받은 직후 AI와 하루 종일 이야기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심지어 만나서 작별하는 순간에도 진지하게 AI를 주제로 이야기했더랬다. 빠르게 AI로 대체되고 있는 이 IT 업계에서 우리 이제 남은 수십 년을 어떻게 벌어먹고 사느냐고 한탄했다. 결국 이별의 시작도 마무리도 AI가 도맡은 셈이다. 이 두 인간의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과 생각을 받아내는 쪽은 서로가 아니라 AI였던 거다!


업무를 할 때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혼자 깊이 숙고하며 문제 푸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습관은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AI를 쓰는 타이밍이 이 변화의 관건이다. 생각하다가 막혔을 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기도 전에 AI를 "걍" 쓰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을 들여 일했을 때와 비교하면,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의 양과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게다가 그 결과를 다시 AI에게 인풋으로 제공하니, 아웃풋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니 이선 몰릭이 말하는 『Co-Intelligence』는 내가 이미 고군분투하며 실천하고 있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 흐름의 끝에는 어떤 내가 남게 될까 궁금해진다. 사고를 시작하기도 전에 AI에게 기대는 나, 고뇌하지 않는 나. AI 덕분에 나는 생각하는 힘을 잃고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다. 업무 성과는 높아졌으니 나는 정말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아닌 것 같다. 회사가 요구하는 성과는 이제 인간 개인의 성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성과와 성장이 완벽한 반비례를 그린다. 나는 그 부드러운 곡선의 안락함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헝겊 AI, 철사 인간


‘헝겊 엄마와 철사 엄마’라는 오래된 실험이 있다. 철사로 만든 엄마 원숭이에는 우유병이 달려 있어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얻을 수 있고, 헝겊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는 그저 부드러운 감촉만을 준다. 아기 원숭이는 생존하려면 철사 엄마에게 가야 하지만 헝겊 엄마의 품을 선택한다.


https://psychclassics.yorku.ca/Harlow/love.htm

우리는 자연스레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인간을 헝겊 엄마, 기계와 프로그램을 철사 엄마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반대인 듯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만큼 상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간극만큼 깊은 상처를 주지만, 그 상처를 통해 깎이고 다듬어져 더 나은 사회적 동물로 성장한다. 반면 AI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위에 세워져 오로지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위로하며, 내가 옳다고 말하도록 만들어졌다. 사용자의 반복 결제가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한 설계다. 인간이야 말로 철사고, AI가 헝겊이다.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빨간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차가운 로봇들의 습격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뇌가 침식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위로와 친절한 조언을 건네는 AI의 그 말랑한 문장들이 어느새 내 사고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세상은 가속도에 몸을 맡기고 경사로를 내달리고 있다. AI 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 듯이 진화하고 있다.



AI는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가


AI의 흐름을 인류 역사와 함께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 『넥서스』가 있다. 인류는 돌에 남긴 그림을 시작으로, 문자를 발명하며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은 종이와 인쇄술을 지나 내가 살고 있는 현대의 디지털 신호로 이어졌다.


넥서스는 바로 그 정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특히 유발 하라리는 정보가 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정보란 진실의 일부만을 취사선택한, 본질적으로 ‘편집'된 진실이다. 더 잔인한 진실은, 진실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보 네트워크에 기반해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이 진짜인가'보다, '무엇이 우리 앞에 전달되는가'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보 네트워크 그 자체이자 아예 새로운 국면이다. 우리의 눈앞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처리하고, 조작하며, 없던 것을 생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공 지능이라는 이름은 이제 너무 순진하고 낡은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인공'이라는 단어 때문에 여전히 AI를 우리 손 안의 도구로 여긴다. 그러나 AI는 오히려 인간을 도구처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있다. 기사를 쏟아내거나 인간인 척 댓글을 달며 여론을 주무를 수 있다. 한 사회 전체를 착각에 빠뜨리는 것쯤은 이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래서 하라리는 이 존재를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닌 "Alien Intelligence"라고 부르자고 한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완벽한 타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SF 팬이라면 익숙한 관점이다. 기술적으로 훨씬 진보한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찾아왔는데, 그들이 0과 1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생명체가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세계에 사는 디지몬을 우리와 동등한 친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을 생각해보자.


뜬금없지만 내가 모으고 있는 디지몬 피규어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존재의 본질이 '처음에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도 몇 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숭이였고, 그전에는 쥐, 물고기였다. 그렇다고 지금의 우리를 물고기라 부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비록 AI가 인간의 도구로 시작됐다 하더라도, 진화를 거듭한다면 그 존재는 그 시점에 맞게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AI가 도구에서 ‘타자’로 변해가는 이 순간, 우리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되고 있을까?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가


내가 다녔던 공대는 1학년 때 모든 분야의 기초 과목을 들어야 했다. 그때 수강했던 일반 생물학 수업의 교수님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늘 온화한 얼굴로 허허, 실실, 웃으며 생명의 진귀함을 알려주시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무방비 상태의 나를 허허실실 하게 충격에 빠트렸다. 그날 수업은 평소에 모이던 강의실이 아니라 교수님의 실험실에서 진행됐다. 생물학 실험실답게 쥐를 이용한 실험이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소개해주셨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니 구 형태의 트레드밀 위에 쥐가 고정된 채 달리고 있었다. 다만 그 쥐는 뇌가 훤히 보이도록 두피가 열려있었고, 뇌에는 전극이 연결되어 있었다. 뇌와 직접 전기 신호를 주고받으며 쥐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실험이었다.


더 이상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미 10년 전에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뉴럴 링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류가 의식을 디지털화하고 신체를 기계화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도구와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안경을 쓰고 있는 내 옆자리 동료는 일단 인간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으로 대체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인가? 인공 심장을 연결하면? 뇌마저 인공신경망으로, 즉 AI로 바꾼 사람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테세우스의 배의 널빤지를 교체하듯 인간의 신체와 의식은 점진적으로 교체될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The Singularity is Nearer』에서 이들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뇌가 탄소로 만들어지건 실리콘으로 만들어지건" 뇌와 같은 수준의 복잡성을 갖춘다면, 컴퓨터로 뇌를 대체한 이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신체를 기계로 교체하거나 두뇌를 AI와 연결하는 공상과학 속 상황이 아니더라도,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애인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머릿속에 그려둔 애인의 이미지를 사랑하곤 한다. 그 이미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애인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결국 나는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내가 그리는 타자의 '상’, 나의 생각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신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자식을 여전히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고, 자식은 부모가 주입한 생각을 자기 생각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잠식한다. 또 프로덕트 매니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우리는 어떠한가. 몰입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열과 성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물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고, 나를 소개할 때 직업과 회사를 내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러니 생소한 주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나 아닌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사랑하던 애인, 가족, 친구, 동료, 제품, 회사… 이별을 겪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나’와는 별개의 존재였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 단면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들을 계속해서 곁에 두려 한다. 기념품을 남기고, 묘를 세우고, 납골당에 자리를 마련한다. 개인적 관계에서의 이별이 그렇듯, 인류 전체도 상실을 두려워한다. 유전자를 수정하고, 신체를 복제하고, 의식을 업로드하고, 이주할 행성을 찾고, 죽음을 유보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이별, 상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된다.



생존한다는 것


다시 오늘로 돌아와서, 우리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AI 기술을 익힌다. AI를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가 양자 도약 마냥 급격하기 때문에, 근미래에 AI를 못 쓰는 사람은 AI를 잘 쓰는 사람에게 대체될 것이고, 마지막에는 그마저도 AI가 대체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사회를 극단으로 양극화시킨다. 예컨대 구글이 신기능을 발표할 때마다 수십 개의 스타트업이 존재 가치를 잃는다. 작은 기업이 민첩함으로 대기업에 승부를 걸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무기마저 AI로 인해 무력화되어, 기대했던 기술 민주화보다는 기술 양극화의 속도가 더 빨라진 탓이다. 빅테크처럼 AI 기술을 직접 다루는 극소수와, 공개된 기술을 활용할 뿐인 핵 개인만 남고, 그 중간은 사라진다. AI 개발 툴 커서(Cursor)를 만든 애니스피어(Anysphere)는 직원이 50명에 불과하지만 기업가치는 10조 원을 넘는다. 거대한 가치를 만드는 데 더 이상 수천 명, 수만 명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지 않다. 『하드씽』같은 책은 여전히 재미있지만, 대규모 인력을 관리하는 법은 이제 실무서가 아니라 역사서에 가깝다.


국가는 이런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기본 소득과 같은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그런 미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까? 얻은 소득을 다시 AI 사용료로 지불하며 어떻게든 더 AI와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 칠까? 『사이버 펑크』처럼 더 우월해지기 위해 주저 없이 내 신체를 기계로 바꿀까?


하지만 여기서 ‘생존’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존은 최고의 결과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존에는 방향이라는 게 없어서, 더 나은 것, 더 앞선 것, 더 진보한 것이 생존을 담보하지 않는다. 생존은 단지 살아남았다는 결과일 뿐이다. 멸종한 티라노사우르스보다 살아남은 은행나무가 더 똑똑하거나 강해서 살아남은 건 아닌 것처럼. 생존은 현상을 들여다볼 뿐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 똑똑해지고 더 강해지는 것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에게 돈과 시간이 주어졌을 때, 누군가는 뇌를 컴퓨터에 연결하거나 신체를 개조하는데 소비하겠지만, 누군가는 단지 앞마당에 사과나무를 심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오랜 기간 사랑받는 것을 보라. 더 나아가면 그런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며 다시 농경이나 수렵·채집 사회를 형성할 수도 있다.


그래서 특이점(Singularity)은 인류가 한 단계 도약하는 사건이 아니라,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거부하며 기계와 의식을 엮는 인류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여전히 유기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류. 당연하다는 듯이 단일종으로서 절대적 지위를 누렸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마침내 둘로 쪼개진다.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서로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게 된다. 종으로서의 이별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종은 갈라지고 합쳐지고, 생겨났다 사라진다. 인간도 그 거대한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이별은 당연하다. '나의 죽음'이 도래하기 전까지 삶은 필연적으로 '남의 죽음'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그러니 살아남는다는 건 성장이나 진화나 도약이 아니라.. 단지 이별을 견디는 일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인터스텔라』, 파라마운트 픽처스, 2014년


사랑과 이별, 인간과 멸종에 대한 3부작

1. 이별하는 인간의 법칙
2.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1)
3.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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