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지나간 자리 (1)

by 낯선은하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나는 그림을 그렸다. 팔이 짧아 볼일을 보고 혼자 뒤를 닦지 못하던 시절에도, 크레파스를 쥔 손이 닿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화방에 다니면서 데생, 크로키, 수채화, 한국화, 아크릴화, 유화를 그렸다. 올챙이는 커서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당연히 예술가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엄마는 예술 학교에 가겠다는 나를 막았다.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라 했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요절한 화가를 추앙하지만, 화가의 꿈을 접은 회사원에게 똑같은 박수를 보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나는 예술을 짝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내 꿈이 허황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상장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결전의 날이었다. 전국 예선을 거쳐 올라간 본선은 놀이공원에서 치러졌다. 친구들은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초대권을 부러워했지만 내겐 초조함뿐이었다. 이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그 공간에서 정작 내 것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 같아 불안했다. 화장실에 가거나 밥을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전목마 앞에 앉아 목만 축이며 그림을 그렸다.



회전목마의 천장을 본 적이 있는가. 날개를 펄럭이는 페가수스와 천사, 요정들이 넝쿨 사이를 날며 마법을 부리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지긋지긋하리만큼 익숙한 비너스, 아그리파, 줄리앙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온갖 곳에 넘실거리는 것과 같다. 굴곡마다 빛이 부서졌고, 나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해는 기울기를 바꾸고, 빛과 그림자는 서로의 자리를 뒤섞기 시작했다. 눈을 잠깐만 돌려도 꾸물꾸물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퀴벌레 같은 음영들을 전부 놓칠 것만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전체를 조화롭게 그리는 대신 윗부분부터 완성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천장의 화려함에 매달리다 결국 시간이 부족해져 그 아래에서 기구를 타는 사람들을 단 몇 분 만에 뭉개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들에겐 빛도 그림자도 없었다. 빈 여백을 메우기에도 급해 큰 붓으로 눌러 덮었다. 사람이라 알아볼 수 있는 건 성의 없이 칠해진 그들의 검은 뒤통수뿐이었다. 나는 울면서 그 초라한 종이를 제출했다.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망작은 대상을 받았다. 어느 예술대학의 교수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이 아닌 존재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사실을 되려 환상적으로 그려낸 것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게 바로 예술 아니던가요. 부디 계속 그림을 그려서 우리 학교에 진학해 주길 바라요."


예술-환상-사실이 머릿속에서 한데 뒤엉켰다. 실타래는 곧 한 줄로 풀렸다. 이미 내 것이라 믿었던 예술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시상대에 선 나는 웃으며 사진을 찍었지만, 플래시 불빛과 함께 내 안의 무언가가 꺼졌다. 날 채우고 있던 빛은 성냥처럼 아슬한 착각. 그 부피만큼 거대한 공허가 가슴에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예술이 한없이 멀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손에 들린 상장은 오히려 내게 예술가의 자격이 없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예술가의 꿈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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