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인간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만나 소통하고 번식하며 진화해왔다. 그러나 지난 150년 동안 전화, 인터넷,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소통은 더 이상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변화를 두고 이렇게 질문했다.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우리는 축소돼왔다. 이것은 진화일까?” (〈당신의 역진화〉)
우리는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 비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이 죽음에 닿듯, 모든 종은 자신에게 붙은 이름의 유통기한이 다하면 멸종한다. 그 시간 동안 인류가 어떻게 나아갈지 생각해본다. 더 잘 보기 위해 안경을 쓰던 인간은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다리 대신 바퀴로 땅을 딛고, 더 깊이 사색하기 위해 생각을 인공신경망과 잇는다. 삶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이 몸의 한계를 벗어나려 한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로운 인간)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호모 데우스(Homo Deus, 신 같은 인간)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사랑하기에 멸종을 선택한다.(1)
그러나 나는 멸종이 두려워 사랑을 선택하고 싶다.(2) 사랑과 멸종 중에서 무엇이 답인지 알기 위해, 두 단어를 정면으로 제목에 내건 유선혜의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을 펼쳤다.
표제작은 제목 그대로, 두 단어를 서로의 자리에 놓아보라고 권한다. 처음에는 낯설다. 의미가 전혀 다른 두 단어이기에,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처럼 어색하게 삐걱거리다 문장에서 튕겨나간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
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
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어젯밤 우리가 멸종의 말을 속삭이는 장면
아주 조심스럽게
멸종해, 나의 멸종을 받아줘
우리가 딛고 있는 행성, 멸종의 보금자리에서
거대한 “운석”은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불러왔고, “위기”는 번성보다는 종말을 앞두고 있을 때 자연스럽다. “속삭이는” 말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는 “우리”는 끝을 이야기하기보다 계속해서 함께하는 삶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다. 단순히 두 단어의 위치를 뒤바꾼 문장들은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연부터 사랑과 멸종이 서로의 자리에 느슨하게 들어맞기 시작한다.
공룡들은 사랑했다 번식했다 그리하여 멸종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한 공룡들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고 그려내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멸종하고
사랑하다
멸종하다
운석의 일방적인 사랑은 지구에 새로운 멸종을 가져온다
공룡들은 한때 지구를 가득 채울 만큼 번성했으나 결국 소멸했다. 그러나 대멸종 시기에도 살아남은 개체들은 다시금 사랑을 나눴다.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있는 후손들이 그 사랑의 증거다. 가르쳐준 적 없는 사랑에 푹 빠진 아이들은 멸종한 이름들을 다시 불러주고, 그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릴 때 더 이상 아이로 불리지 않게 된다. 아닌가, 아이들이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때 어른이 되었던가. 억겁의 시간 동안 외로움을 견뎌온 지구에게 운석은 강렬한 입맞춤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운석의 위협이 사라졌을 때 지구에는 사랑과 새 생명이 넘쳐났다. 사랑으로 한 번, 멸종으로 한 번, 두 벌의 전혀 다른 글이 펼쳐진다.
더 나아가, 이제부터는 사랑과 멸종이 완벽하게 겹쳐진다. 두 단어를 아무리 바꿔 넣어도 차이를 알 수 없다. 언제부터 사랑과 멸종이 같은 의미였지?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리고 사랑 때문에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거야
사랑 때문에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거야, 맞는 말이다. 멸종 때문에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거야,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멸종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랑하는 것들과 언젠가 반드시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별들이 모두 모여 멸종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사랑인가, 멸종인가? 어쩌면 둘은 처음부터 같은 감정의 앞면과 뒷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면 사랑과 멸종이 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운석은 다가오고 우리들은 어떤 방식으로 완벽하게 침묵할 것인지 어젯밤 우리가 나누던 말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폭발할 때 가장 빛나는 것
말 단어 대화 목소리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미래 어딘가에 있을 이별이 “운석”처럼 조금씩 가까워진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초침이 오로지 죽음을 향해 째깍째깍 흘러가는 것처럼. 그 종말의 순간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모든 말을 멈춘다. 이별 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죽은 후엔 입과 귀가 영영 멎어버린다. “완벽하게 침묵”한다. 그러므로 어젯밤 우리가 나눈 대화, 어떤 방식으로 침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이별할지를 더듬는 말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침묵하지 않고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여전히 ‘사랑’인가?
구분할 수 없다. 둘은 서로를 완성한다. 멸종에는 사랑이, 사랑에는 멸종이 필요하다. 이 시의 작가 유선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엔 끝이 있다는 것이 모든 일을 허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기에 모든 일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동시에 허무한 느낌. 사랑과 멸종 모두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소중함과 허무함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끝을 예감할수록 사랑이 더 선명해지고, 더 뜨거워지고, 더 애틋해지기 때문이다. 〈멸종위기사랑〉의 후렴 가사 “사랑의 종말론”을 따라 부를 때 그 발음이 “사랑해 정말로”와 포개지는 것은 우연을 넘어 필연이다.
그렇게 사랑과 멸종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딱 소중한 만큼만 허무함을 느끼듯, 허무맹랑하고 불확실한 약속의 크기만큼 사랑이 팽창한다. 그러다 임계점에 이르면 그것을 채우고 있던 감정들이 “폭발”한다. 그 순간 인간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사랑하는 건지, 이별하는 건지.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지. 어젯밤 네게 건네던 말, 단어, 대화, 목소리… 소멸을 향해 흐르면서도 터져 나오는 마지막 빛이다. 사라지기 직전 가장 밝아지는 초신성처럼 사랑의 순간도 그렇게 찬란하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흐름을 거스를 수 없으니, 침묵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앞서서 그 침묵을 깨는 것. 너에게 “사랑해, 정말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 사랑의 마지막이자 최초의 문장으로 이 순간을 빛내는 것.
사랑이 멸종인 줄은 알면서 멸종이 사랑인 줄은 몰랐던 때 그린 만화
이로써 사랑과 이별, 인간과 멸종에 대한 3부작이 끝났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을 사랑해요. 정말로!
1. 이별하는 인간의 법칙
2.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1)
3.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