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1)

《경험의 멸종》

by 낯선은하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시공사, 2024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저자 크리스틴 로젠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직접 경험의 예로 '그림 그리기'를 이야기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눈과 손을 움직이며 "신체와 정신을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는 이의 경험은 어떠한가? 향도,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납작한 세계를 오로지 시선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림을 창조하는 행위만 남기고 감상은 도려내야 할까? 모르겠다. 누군가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직접 경험 없이도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귀한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인간은 바로 그 능력으로 세계를 확장시켜왔다.


글은 어떨까? 글이야말로 그 어떤 매체보다 폭력적으로 차원을 낮춘, 심지어 색깔마저 배제한 1차원의 꼬부랑 선으로 이루어진 미디어다. 그럼에도 글은 인류를 바꾼 혁명이었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을 상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직 되어보지 못한 부모로서의 사랑,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의 절박함, 지구를 바라보는 외계 생명체의 자애로움을 느낀다. 흰 바탕의 검은 활자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뇌는 무언가를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듯 반응한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될 때, 캐스팅된 배우의 얼굴이 내가 상상했던 인물과 달라 실망해본 적이 있다면, 책을 읽으며 느낀 감각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이처럼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뇌 속에서 재현하는 법을 터득한 존재다.


저자 역시 그 위력을 알고 있다. 간접 매체를 경계하자면서도, 그녀 또한 '글'을 통해 외치고 있으니. 이 모순이야말로 경험의 멸종 책이 가지는 우스꽝스러운 매력이다. 그런 모순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읽는다면 저자의 진짜 메시지가 보인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선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텍스트, 이미지, 비디오, 이 모든 것은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을 무궁무진하게 넓혀 준 도구다. 하지만 이 기술들은 "우리를 위한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계자의 엄청난 이익이라는 목적도 있다."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주체로서 내가 어떤 경험으로 나의 삶을 채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무엇을 경험하기로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삶을 사랑으로 채울 것!


‘멸종’을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종'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생각해본다. 생물학적으로 종은 서로를 선택해 다음 생명을 남길 때 유지된다. 그 과정의 출발점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종을 존속시키는 근본적인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사랑으로 채우기로 결정한다.


내게 사랑이란, 한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려는 경험이다. 아주 아주 사소한 것들을 천천히 알아가는 일이다.


예컨대 나는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강아지 M을 사랑한다. M의 무심한 성격, 구운 빵 같은 빛깔, 고소한 냄새, 짧은 다리, 부드러운 털결을 사랑한다. M을 데려왔던 유기견 보호소에는 수십 마리의 개들이 있었고, 그날 그곳에 있던 개들 대부분은 아마 안락사되었겠지만, 그 사실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그저 M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웃을 뿐이다. 이렇듯 사랑은 모르는 것들을 향하는 감정이 아니다. 추상이 아니다. 단 하나의 몸, 하나의 성격, 하나의 서사를 향한 구체(具體)다.


또 무언가를 깊이 알게 되면 혐오가 사라진다. 이슬람 교인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게임 개발자 A와 함께 웃고 떠들며 식사하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릴 적 느꼈던 게임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서 게임 개발자가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는 더 이상 군중이 아니라 A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을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로 만날 때 더 이상 혐오할 수 없게 된다. 이찬혁이 〈멸종위기사랑〉에서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대”라고 노래한 것도, 어쩌면 그런 사랑의 개별성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에서 벗어나 삶을 충만한 사랑으로 채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한다. 서로를 마주 보고, 숨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악수하고, 포옹하는 경험으로 우리의 24시간을 채워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날로그적으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멀리 떨어진 목소리에서도, 화면 속 문장에서도 우리는 사소함을 알아차리고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뇌과학적으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결국 뇌에 전달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기술이 발전해서 우리의 오감이 뇌에 전달하는 신호를 100% 똑같이 모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진짜 경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난 그 경험 또한 기꺼이 사랑이라 부를 것이다.





사랑과 이별, 인간과 멸종에 대한 3부작

1. 이별하는 인간의 법칙
2.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1)
3. 사랑의 종말론, 사랑해 정말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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