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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Jul 05. 2020

제인 포스터, 이승과 저승을 잇는 발키리 되다

발키리: 제인 포스터 #1-5 리뷰

<발키리: 제인 포스터> 시리즈는 2019년 이벤트 <워 오브 렐름즈>에서 이어져 나온 스핀오프 솔로타이틀입니다. 북구신화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미드가르드'라는 이름으로 총 아홉세계 중에 단 한 곳에 불과하다고 하죠. 마블코믹스 세계관에서는 거기에 하나를 더해 총 열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워 오브 렐름즈>는 이 열 세계가 말레키스라는 빌런의 지휘 하에 한데 뭉쳐 미드가르드를 침공한다는 역대급 스케일의 이야기예요. 치열한 전투 끝에 미드가르드를 지키려던 발키리들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발키리이자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슈퍼히어로인 브룬힐데를 포함해서 전원이 말이에요.

워 오브 렐름즈를 마무리 짓기 위해 모인 과거, 현재, 미래의 토르들.

제인 포스터는 전우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원동력 삼아, 주인을 잃은 평행우주 묠니르를 들어올려 다시 한 번 토르가 되었습니다. 싸움 끝에 제인이 사용한 묠니르는 부서져 "모든 종류의 무기로 모습을 바꾸는" 새로운 무기가 되어 제인에게 새로운 운명을 종용하였죠. 이것이 <발키리: 제인 포스터> 시리즈의 배경이야기입니다.

제인이 발키리가 되는 과정은 시리즈 연재 시작 직전에 발매되었던 <워 오브 렐름즈: 오메가> 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제인이 동료이자 친구인 브룬힐데의 유지를 잇는 것뿐만 아니라, 브룬힐데의 영체와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지위를 계승받게 됩니다. 제인이 토르로서 많은 사랑을 받은 캐릭터였으니 또 다른 페르소나로 히어로 일을 계속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은 당연한 거 같아요. 그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발키리였느냐? 라는 질문에 작가 제이슨 아론은 제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발키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원동력이 해야만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고야 마는 제인의 영웅적인 면모와 함께 더불어, 발키리의 부재로 인해 파생된 토르의 슬픔과 애끓는 좌절을 향한 공감과 연대였다는 점이 저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나는 발키리가 됐어. 무슨 일이긴, 바로 그런 일이지.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보도록 할까."

<제인 포스터: 발키리>를 시작하는 첫단추와 같은 제인의 대사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실제로 첫 스토리아크의 주제 역시 그런 맥락이거든요. 이제 막 새로운 히어로로 거듭난 제인이 새로운 힘과 능력을 차근차근 습득하고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들. 특히 "발키리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보는 이야기입니다.


첫 이슈는 제인의 현 스테이터스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소개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발돋움을 하기 시작한 뉴 발키리로서의 제인과, 어떻게해서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민간인으로서의 제인. 동전의 양면이지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지겹도록 다뤘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 없는 맛깔나는 소재예요. 이중 정체성에 대한 딜레마와 갈등입니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제인이 계속 "스파이더맨은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살아온 거야?"라는 둥, "스파이더맨이 이런 행동을 했다가 사람을(그웬 스테이시) 죽이지 않았었나?"라는 둥 언급을 하는데요. 솔직히 이건 마이너스 요소였어요. 제인이 스파이더맨과 친하면 얼마나 친하다고 그래요. 이건 누가봐도 '제인의 생각'이 아니라 제인을 쓰는 작가의 생각이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감점 요인이었어요.

"너는 역할을 받아들인 거야. 역할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책임감인 거지. 토르는 신이었지만. 발키리는… 일이야."

브룬힐데의 팬분들에게는 희소식이에요. 발키리가 이승과 저승을 잇고, 죽은 영웅들을 발할라로 인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지금은 죽어 active한 활동을 보이진 않더라도 이렇게 찬조출연을 해서 선배로서 후배인 제인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거든요. 첫 스토리아크에서 눈에 띄게 반복되는 키워드는 바로 Job입니다. 제인 포스터에게 있어 발키리는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온오프가 가능한 업무에 가깝다고 묘사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토르 시절의 제인에게는 이런 이중 정체성 테마는 덜한 편이었어요. 그도 그럴게, 암 환자 제인에게는 제대로 된 일상이랄 것이 없었거든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영웅 토르로 변신해 세상을 지키느라 항암 치료를 게을리했고, 변신 마법이 그나마 투입받은 약물조차도 무효화했다는 게 제인 토르 스토리에서 가장 큰 갈등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요. 대신에 토르라는 정체성을 아주 적극적으로 포용해서, 미처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토르다운 대사를 읊기도 하는등 토르라는 인격을 일부 이식한듯한 경지까지 보이곤 했습니다. 반면 이번 시리즈에서 제인은 발키리라는 것은 내가 가진 직업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요. 토르와 발키리. 둘다 북유럽신화에 기초를 두고 있는 아스가르드의 영웅이지만 이렇게 테마가 달라지네요. 흥미로웠습니다.

이슈를 거듭해나가며 제인이 맞서야하는 첫번째 빌런은 다름 아닌 불스아이와 그림리퍼입니다. 아니, 불스아이? 그림리퍼? (I mean, come on!) 제인이 토르였을 때 맞서 싸웠던 상대들을 생각해보면 (무려 첫 권에서 그 유명한 디스트로이어와 싸웠죠, 기억나시죠?) 다운그레이드된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숙적을 알면 영웅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아론과 유잉이 쓰는 발키리 제인은 대체 어떤 영웅이기에 이런 스트릿 레벨의 적들을 상대하는 것일까요. 


라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제법 충격적인 전개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용병 불스아이를 채택한 이유도 그럴듯하고, 정발된 <비전>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던 그림리퍼를 다시 꺼내온 것도 그럴싸해요. 무려 메피스토가 배후에 있다고 한다면 말이에요. 결국 이승과 저승을 잇는 발키리 제인이 싸워야하는 숙적은 저승에 속해있으면서도 공교롭게도 이승에 발묶인 악마라는 소리 아니겠어요. 아이러니의 향연. 이야기가 재밌어집니다.

아론과 유잉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제법 무거운 편입니다. 애초에 담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무거워요. 제인의 독백을 위주로 서사가 진행되다보니 제인의 심리를 아주 가까운 필치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제인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다보니 (동료이자 선배들의 죽음, 유일한 발키리라는 부담감, 근무태만으로 좌천되어 집세걱정 돈걱정.) 당연하다고 볼 수 있어요. 애초에 발키리가 죽음과 멀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걸수도 있겠어요. 작가는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켜주기 위해 동물 컴패니언을 등장시켰는데요. 무려 말하는 페가수스 '미스터 홀스'입니다. 제가 또 동물 컴패니언하면 껌뻑 죽잖아요. 찐한 사투리를 쓰는 말이 깜찍하게 구는데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여기에 펜슬링과 잉킹을 동시에 도맡은 카푸의 작화는 금상첨화였습니다. 수묵화처럼 깊고 얕음을 자유자재로 묘사하는 솜씨가 너무나도 훌륭했어요. 진지면 진지, 개그면 개그, 못하는 게 없다.

좋은 장면이 너무너무 많아서 다 하나하나 집지 못하는 것도 문제네요. 이를테면 이 장면. 제인 포스터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옛 가족들을 떠올리면서 트라우마틱한 경험을 되새김질하는 순간의 묘사가 컬러링만으로 완벽하게 표현돼있어요. 


이 패널의 모든 색들, 벽지며 소파며 레디에이터 따위가 전부 무채색의 회색빛으로 변해버려요. 그날의 사건이 제인에게 있어 얼마나 우울하고 심려스러운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에요. 세상의 모든 색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죠. 펜슬러는 제인의 눈을 확대해서 독자들이 그 눈에 담긴 감정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제인의 눈동자색만 포인트컬러로 놔둔 것은 그 감정을 더욱 돋보이게 해줘요. 


그 다음 패널에서 괜찮은척 내색하는 제인이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라고 캡션으로 독백하지 않아도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죠. 제인의 주변에 색이 돌아왔으니까요. 어휴, 정말이지. 곱씹을수록 좋네.

처음-중간-끝이 잘 짜여진 스토리에,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그림 작화까지 보장된 좋은 책이었습니다. 무조건 추천드립니다. 

슈퍼히어로 제인 포스터의 여정, 그 첫시작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번에 새로 정발된 <토르: 천둥의 여신>으로 입문해보셔도 좋을 거예요. 제가 번역을 맡아 열심히 작업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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