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 리뷰
한 작가가 무려 10년 동안 한 작품을 도맡아 썼다면 그만큼 그 작가가 능력이 있다는 뜻이겠죠. 댄 슬롯이 스파이더맨을 집필한 이래로, 원래부터도 잘 팔렸던 스파이더맨 코믹스는 마블의 최고 으뜸 타이틀로 자리매김하여 우수한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저 역시 코믹스에 처음 막 발을 디뎠을 때 댄 슬롯이 쓴 책들을 즐겁게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판매량이 좋다고 해서 그 책의 작품성마저 보장하지는 않는 법이죠.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댄 슬롯은 언제나 문제작들을 써왔고, 올해 새로 한국어정발된 신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는 2015년 [올 뉴 올 디퍼런트 마블] 라인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대기업 C.E.O. 피터 파커'라는 정체성을 시원하게 날려버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가난뱅이 피터 파커'로 되돌려놓은 책입니다. 이때 마블이 추구한 라인업 브랜드는 [마블 레거시]로 분류합니다. 2017년 이벤트 <시크릿 엠파이어>의 타이인에 해당하는 이슈들을 수록하면서, 그 전후 사정까지 포괄해 볼륨이 제법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행본을 1부, 2부, 3부와 한 편의 외전으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1부는 가상의 국가 심카리아를 배경으로 한 '그린 고블린 vs. 스파이더맨' (이슈 #25-28), 2부는 시크릿 엠파이어 타이인 '슈피리어 옥토퍼스 vs. 스파이더맨' (이슈 #29-31), 3부는 백수 폐인 피터 파커의 홀로서기 (이슈 #789-791), 마지막으로 외전은 노먼 오스본의 자아탐색 (이슈 #32). 각각 개성이 강하고 구성지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옵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름 아닌 아트웍입니다. 작화가. 정말. 정말. 정말 좋아요. 이렇게까지 좋아도 될 일인가? 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훌륭합니다. 펜슬러 스튜어트 이모넨 당신은 그저 빛이야. 이모넨의 페이지 구성력은 정말 연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요. 하얀 여백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페이지조차도 이모넨의 손을 거치면 빈틈 하나 찾을 수 없도록 꽉꽉 들어차있어요. 개인적으로 이모넨이 가장 강점을 보일 때는 양면페이지(Double-page spread)를 선보일 때라고 생각해요. 분명 패널과 패널 사이가 끊겨있으나 끊겨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으니 말 다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아트웍을 앞으로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아쉬운 거 있죠. 이모넨이 작년에 은퇴선언을 했거든요. 이번달 정발작품인 <레드 고블린>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어요. 서러워서 살겠어요 정말...
레터링 역시 환상적입니다. 댄 슬롯의 문체는 특히 연재 후반부에 가까울 수록 대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요(마치 클래식 고전작품에서 그랬듯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다!를 주절주절 떠들어대는듯한 Corny함이 있습니다). 레터러가 말풍선 배치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시선이 오고가는데 어색함이 없습니다.
외전인 이슈 #32는 피터 파커가 아닌 노먼 오스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독립적입니다. 작화 역시 <문나이트>에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깊이있게 탐구했던 그렉 스몰우드가 맡아 잘 어울렸어요.혈청의 도움 없이 내면에 잠든 고블린을 찾아 나서는 오스본의 이야기인데요. 약간의 반전은 언제나 즐겁죠. <시크릿 엠파이어> 단행본 중에서 가장 작품성 있는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약간 트집잡기처럼 사소한 아쉬움인데요. 무협 영화에서 나오는 신비한 동양 사원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장면인데, 이때 "Master Hawk", "Master Ox", "Master Snake"를 한자어로 번역해서 (한자)를 옆에 붙여주는 방안은 어땠을까요? 마스터라고 외래어 표기하기보다는 "뱀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한편. 하늘 아래 흠결 없는 완전무결한 작품은 없다죠. 그래요, 댄 슬롯은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물론입니다, 하이드라와 맞서 싸우는 피터 파커의 고결함 좋지요. 스토리는 무난하게 즐길만합니다. 10년 동안 한 작품을 맡아 쓰다보니 자기복제를 거듭해 예상에 빗나가지 않고 무난하게 흘러가는 전개가 편안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작가인 댄 슬롯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이에요.
"불편하네 이거. 동양인만 쥐어패고 있으려니 좀..."
"여긴 홍콩이잖아. 악당들 전부 동양인이야. 착한 사람들도. 모든 사람이 다 동양인이지."
"모든 인종과 다양한 종교인을 쥐어패는 데 익숙해져서 그래. 뉴욕에선 그랬다고."
이딴걸 조크랍시고 넣어서 피터에게 백인의 나이브함을 어필하게 만드는 작가 댄 슬롯.
홍콩에 사는 동양인은 알파벳 U, B, F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잘 알아듣지 못하게 됐다는 말도 안 되는 스토리를 써내는 작가 댄 슬롯.
댄 슬롯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하차한 직후 맡은 판타스틱 포 #2 이슈에서는 외계행성의 원주민을 붉은 피부로 묘사해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습니다.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을 홍인족이라 부르는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뜹니다. 댄 슬롯은 성차별주의자이기까지 하거든요.
이 장면은 정말 처음에 읽고서 내가 영어 해석을 잘못한 게 아닐까 묻고 싶을 정도였는데, 번역본을 보니 제 해석이 맞았으며 작가새끼는 멍청하고 얼빠진 자식이라는 게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댄 슬롯이 예시를 들었던 시리와 알렉사는 여성형 목소리를 지닌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 비서 역할에 왜 여성의 목소리를 입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겨레의 이 기사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성 목소리를 사용한 것에 따른 결과와 영향은 또 별개의 문제잖아요? 앱스토리의 이 기사에서 인용한 유네스코 보고서를 재인용하겠습니다.
최근 유네스코(UNESCO)는 독일 평등기술연합(EQUAL Skills Coalition)과 함께 발행한 <할 수 있다면 얼굴이 빨개질 거야: 교육을 통한 디지털 기술의 성 격차 해소(I'd blush if I could: Closing gender divides in digital skills through education)> 보고서를 통해 “여성 목소리의 인공지능 음성인식 비서가 사용자에게 여성을 ‘기꺼이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도우미’라는 편견을 주입시키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그들이 종종 모욕에 대해 회피적이고, 미숙한 또는 사과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라며, 아마존의 알렉사(Alexa)나 애플의 시리처럼 음성인식 비서에 여성의 이름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와중에, 댄 슬롯은, 뭐요? "로봇에 남성 목소리를 억지로 입히지 마라"?? "여성의 디지털 목소리를 억압하지 말라"???
놀랍게도 이게 끝이 아닙니다.
잘생기고 능력있는 여성이 "세상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나이" 자신보다 급이 낮은 남성과 사랑에 빠져 사귀고 있다면 그 이유가 돈 밖에 없을 거라는 말도 안 되게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여성 엑스트라 캐릭터의 입을 빌려 댄 슬롯은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위의 '여성의 디지털 목소리' 개소리를 페미니스트이자 여성인 바비의 입을 빌려서 하고 있듯이 말이에요. 작가의 멍청한 생각을 캐릭터에게 시키지 말라 이거예요.
그렇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크릿 엠파이어>는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멍청함 때문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비운의 책이에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