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나연 Aug 10. 2020

그 회사가 80주년을 기념하는 방법

마블코믹스 #1000 리뷰

마블코믹스는 2019년에 80주년을 맞아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특이한 방식의 마케팅을 선보였습니다. 작년에 그에 대한 자세한 칼럼을 쓴 적이 있어 링크를 남깁니다. 

아, 그날 새벽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미국과 한국의 시차 때문에 코믹스 소식이 올라오는 건 언제나 새벽이랍니다.) 며칠 전부터 "대박 프로젝트"라며 예고의 예고를 거듭하더니 약속한 그 시각이 딱 지나니 구독팔로했던 존잘 작가님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이름이 박힌 이미지를 타임라인에 한가득 수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때는 레전설이었으나 지금은 마블과 결별하고 다른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님들 (이를테면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 켈리 수 디코닉, 은퇴한 스튜어트 이모넨 등등...) 까지 말이에요. 뭐야, 뭔데,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데! 일동 흥분의 도가니! 뭐라도 좋으니까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많이 나오는걸로! (ㅋㅋㅋ) 애타게 바랐던 새벽이었지요.


마케팅이 참 똑똑했습니다. 하늘까지 치솟은 어그로 계수! 정말 모두의 이목을 한방에 휘어잡아 끌어당겼으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성공적이어서 오히려 독이 됐던 걸까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작가당 한페이지씩 (꼴랑 한장!??) 맡겨서 마블코믹스 회사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앤솔로지였고... 솔로타이틀이나 이벤트 같은 신작을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실망이었죠. 저도 적잖이 실망하고는 "안 사!!!!! 안 읽어!!!!!" 심통을 냈었더랍니다.


그도 그럴게, <마블코믹스 #1000> 기획은 노골적인 상술처럼 느껴졌단 말이죠. 그맘때 마블의 영원한 라이벌 DC코믹스에서는 마땅히 기념작 기획을 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어요. 2018년에는 슈퍼맨 80주년을 맞아 액션코믹스 통산 #1000호를 달성해 기념이슈를 빠방하게 냈었고, 2019년에는 배트맨 80주년을 맞아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지요. <마블코믹스 #1000>의 숫자가 왜 하필 1000이냐? 딱히 이유 없습니다. 단지 라이벌 DC사의 바이브에 은근슬쩍 편승했을 뿐. 으이구, 정말.

시간은 지나 어느덧 2020년. 시공사의 은덕을 입어 <마블코믹스 #1000>이 한국어정발 되는 경사가 생겼습니다. 위에 마블 욕을 푸짐하게 해놓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덕후란 아무리 뒤통수를 맞아도 때 되면 기뻐하는 그런 족속 아니겠습니까. 원래 모든 정발은 경사입니다. 주어짐에 감사해야죠! 정발됐다는데 당연히 한번쯤 읽어드려야죠!


읽어본 결과, 오우! 상당히 괜찮았어요. 이슈가 막 발행됐을 때 (호구처럼 9.99달러를 내고) 코믹솔로지에서 사서 읽었어도 전혀 불만이 없었을 정도의 퀄리티. 작가들이 아무리 배당받은 페이지가 한쪽 밖에 안 되더라도 역시 이름값은 하는구나 싶었어요. 역시 한국어 정발되는 작품은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또 했어요. 그 많고 많은 후보들 중에 콕찝어 이 책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에요.


어떻게 어떤 점에서 괜찮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봐야겠지요. <마블코믹스 #1000>은 마블사의 8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뜻깊은 특별 이슈였습니다. 한 쪽을 넘길 때마다 1년이 지나가요. 그 해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아서 쪽만화로 녹여내었어요. 스토리텔링 방식, 컷과 컷을 넘나드는 연출, 화풍과 스타일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해서 화려하고 풍성한 볼거리로는 단연 1등감이었다고 생각해요. 


스토리적으로도 무척 훌륭합니다. 쪽만화들을 엮은 책이니만큼 중구난방해지기 쉬웠을 텐데, 페이지를 넘기다 잊을만 하면 나오는 앨 유잉의 '마스크 라이더' 스토리가 단단하게 뼈대 역할을 해주어서 훨씬 정갈하고 맵시있게 느껴져요. 게다가 아담 워록의 광팬인 저로서는 이 신비한 마스크의 배후에 있는 과학자 집단 '엔클레이브'가 낳은 걸작 Him/아담 워록을 재조명해주어서 감사 또 감사할 노릇이지요. 마블은 아담 워록을 좀 더 적극적으로 써먹어줘야 한단 말입니다. 그놈의 아담 IV 떡밥이 대체 뭔지~~ 충격적인 비주얼에 머리를 싸매고 미치고 팔짝뛰는 지경이라구요~!!! 기대만발 설레발 김칫국!!!!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마블이 오래된 캐릭터를 재발굴해내어 쓱싹쓱싹 세련되게 손보아 내놓는 일이 빈번했다는 거예요. 1940년대 나치와 싸우던 금발 백인 여성 미스 아메리카를 2010년대에 꺼내어 평행세계에서 온 라티노계열 여성으로 설정변경을 했는데, 이번 기념이슈에서는 후자 설정변경 버전으로 1943년 페이지에 수록했어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춤 변형식의 옳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로맨스 일상물의 주인공이었던 팻시 워커 캐릭터를 액션물 슈퍼히어로 '헬캣'으로 변모시킨 것도 또 다른 예시구요.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에서 헬캣 캐릭터를 이런 역사와 함께 제법 잘 써주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다만 <마블코믹스 #1001>이라고, 후속작은 많이 아쉽습니다. 앨 유잉의 '마스크 레이더' 연작이 구조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지 않고, 시대별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형식도 없고, 정말 쪽만화를 난잡하게 섞어놓은 느낌이라서 상당히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중간중간 좋은 부분은 많아요. 대체로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쪽만화는 다 괜찮습니다. (제가 스파이더맨 팬이라서 그런걸까요?^^)


갓... 그저 갓. 제리 콘웨이 당신은... 정말 빛이야.

70년대를 기념한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시대에 한 획을 그었던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웬은 또 한 번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또 벌써부터 지겹죠.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다름 아닌 메리제인의 입장에서 그웬의 죽음을 풀어준 거 아니겠어요. 세상에. 제가 2015년에 딱 이런 팬픽을 썼었는데. (!!) 엠제이 입장에서 죽은 그웬을 추억하는 내용의 팬픽 말이에요. 근데 세상에 세상에, 역시 원작을 이기는 동인은 없어요. 어쩜 이렇게 완벽하고 절절하게 그려주었는지 가슴 퍽퍽 치고 난리 났었습니다 진짜 ㅠㅠㅠ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ㅠㅠㅠㅠ 그웬의 장례식날 피터가 잔인한 말로 엠제이를 밀쳐냈을 때 '달칵' 문을 닫고 피터 곁에 남아준 이유가 다름 아닌 그웬 때문이었다니요. 이런 킹갓엠페러제네럴충무공 캐해석 같으니라고 ㅠㅠㅠㅠ 아!!! 진짜 저는 여성캐릭터가 너무 좋아요. 엠제이가 너무 좋아!!! ㅜㅜㅜ 제리 콘웨이 진짜 당신만한 피터엠제이 쉬퍼는 없어!!! 최애캐 보정 받아서 <마블코믹스 #1000>은 갓작으로 승격드리는 바입니다. 땅땅땅. 부당하다고 느껴도 소용 없어요. 아무튼 그런 거임.


이 페이지도 너무 좋았어요. 수많은 로키들의 세대교체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그려내주다니 감동이에요.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You can escape.를 "벗어날 수 있어."라고 간단하게 옮겼는데요. 틀린 말까지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You에 엠파시스가 있다는 건 "나는 escape하진 못했지만 이번에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유혹하는 듯한 뉘앙스라고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너는"을 살려야했다고 봐요. 작은 아쉬움입니다.


저는 <마블코믹스 #1000>을 다 읽고 아래의 책들이 읽고 싶어졌어요. 이어서 읽으면 좋은 책 목록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네요.

엘사 블러드스톤이 누군지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진짜 골때리는 성인지 감성의 팀북입니다. 재밌어요. (워런 엘리스가 개자식이라는 것만 빼면요.)

톰 테일러가 쓴 올 뉴 울버린에서는 로건의 여성클론 로라가 울버린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이 그렇게 괜찮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언젠간 꼭 읽어야지 했는데, <마블코믹스 #1000>을 읽은 지금이 딱 최적의 시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작가 켈리 톰슨의 데드풀 온고잉 시리즈. 여기서 진짜 귀여운 상아지(!) 귀염둥이 아기 육지상어 '제프'가 나온다지 뭐예요. 애니멀 사이드킥이라면 껌뻑 죽는 저이기 때문에 많이 솔깃합니다. 

사악한 과학자집단 '엔클레이브'가 세상을 정복할 목적으로 만든 인조인간 Him은 이후 '아담 워록'이라는 이름을 갖고 우주를 구원하는 구세주 아이콘이 된답니다. 아담의 초기 모험을 담은 단행본이에요. 작년에 열심히 읽어놓고 다 까먹어버렸으니 다시 읽어보려 사두었습니다.


읽을 책은 많고 시간도 많습니다. 어서 풍덩 빠져봅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용서할 수 없는 작가적 결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