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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Sep 29. 2019

신의 갑질에 대항한 영웅,
아라크네를 위한 변명


이 장면에서 아라크네의 자살시도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혹은 아티스트로써 존엄하게 죽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러나 아테네는 아라크네의 존엄성을 너그럽게 지켜주는 대신, 그녀를 얼굴없는 베짜기 ‘단순 기술자’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저주는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너는 죽을 수조차 없어”, 생사여탈을 손에 쥔 자의 잔인함으로 읽힌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친 대가로 벌을 받지만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있으며 존엄성에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이후의 신화에 등장해도 그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신으로 존재하며 존중받는다. 여러모로 아라크네에게 벌이 과하다는 느낌.

두번째, 아티스트로서 아라크네의 작품이 가진 힘이다.

‘베짜기’는 고대 그리스 당시나 지금이나 여성의 영역, 그래도 요즈음은 아트의 영역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영웅들이 활약한 몸(파워)의 영역과 비교해본다면 소극적이고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아라크네의 작품은 신의 실수에 관련한 것이었다(가재는 게 편이라 아테네는 이 주제에 대해 더 분노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세상에 떠돌 경우 어떤 일이 생길까? 신들의 권위가 우스워지면서 절대권력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비주얼 아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다(우병우를 찍은 사진 한 장을 생각해보라.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표현은 비주얼 아트의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테네는 보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이 작품과 이 작품의 창조자인 아라크네가 살아 있는 한 기득권에 대한 위협과 도전이 계속될 것임을. 그래서 서둘러 조기진압을 했어야 했다. 아라크네의 존엄자살을 허용하는 것은 그녀를 레전드로 만들 것이므로, 격을 떨어뜨려 거미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기록자를 불러 경고의 차원에서 이 글을 남겼을 것이다. 아라크네는 그렇게 일벌백계의 참조자료가 되어버렸다.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점, 깨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절대 파워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영웅이라는 호칭에 적합하다.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만하게’ 신에게 도전한 아라크네는 복권되어야 마땅하다. 그녀는 신화에서조차 차별받은 여성 아티스트 영웅이었다

신화 한 줄 요약: 인간 여성인 아라크네는 아테네 신과 베짜기를 겨루는 과정에서 그녀의 미움을 받아 거미가 된다.


모든 이야기는 형용사나 수식어를 통해 서술자의 가치판단을 은연 중 전달하기 마련이지만

유독 이 신화에서는 스토리텔러의 못마땅한 시선이 두드러진다; ‘비천한 태생’ 이라거나 ‘오만한’과 같은 단어로 아라크네를 묘사하고 있어, 아무 생각없이 읽다 보면 덩달아 아라크네를 ‘싸가지 없는 XX’으로 보기 쉽다.


수식어를 빼고 젠더를 빼고 중립적으로 이 신화를 보라. 사실 이는 신에게 도전하고 신과 대립구도를 세운 영웅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지 그 영웅이 인간 여자이고 영역이 베짜기라는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영웅과 다를 뿐이지. 그렇다면 아라크네는 왜 영웅으로 기록되지 못한 걸까.


우선 아라크네에게는 신의 빽, 기득권이 없었다. 순수 인간 혈통인 그녀는 절대권력인 신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껏 분노를 터뜨려도 되는 만만한 ‘계급’이었다. 반면 헤라클레스나 페르세우스 등의 남성영웅들은 출신이 다르다. 그들은 데미 갓 demi-god이다(성골쯤 되려나). 유전적으로 신의 전능함을 가지고 있으며 가끔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죽어서 별자리가 된다. 헤라도 헤라클레스를 미워했지만 괴롭힐 뿐 감히 죽이거나 거미따위로 만들지는 못한다.


신화는 아라크네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깨닫고 자살을 하고자 했으나 자살에도 실패, 거미가 되어버리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지극히 계급적인 시각 아닌가. 밟아도 꼼짝 못하던 천한 것이 각성을 하고 덤벼들었을 때 기득권자는 이를 응징하며 엄숙하게 말한다. “네 주제에 어딜 감히…부끄러움을 알아야지.”


어딘가 사악해보이는 아라크녀

           

이 장면에서 아라크네의 자살시도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혹은 아티스트로써 존엄하게 죽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로 보인다(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러나 아테네는 아라크네의 존엄성을 너그럽게 지켜주는 대신, 그녀를 얼굴없는 베짜기 ‘단순 기술자’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저주는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너는 죽을 수조차 없어”, 생사여탈을 손에 쥔 자의 잔인함으로 읽힌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친 대가로 벌을 받지만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있으며 존엄성에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이후의 신화에 등장해도 그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신으로 존재하며 존중받는다. 여러모로 아라크네에게 벌이 과하다는 느낌.


두번째, 아티스트로서 아라크네의 작품이 가진 힘이다.

‘베짜기’는 고대 그리스 당시나 지금이나 여성의 영역, 그래도 요즈음은 아트의 영역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영웅들이 활약한 몸(파워)의 영역과 비교해본다면 소극적이고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아라크네의 작품은 신의 실수에 관련한 것이었다(가재는 게 편이라 아테네는 이 주제에 대해 더 분노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세상에 떠돌 경우 어떤 일이 생길까? 신들의 권위가 우스워지면서 절대권력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비주얼 아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다(우병우를 찍은 사진 한 장을 생각해보라.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표현은 비주얼 아트의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테네는 보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이 작품과 이 작품의 창조자인 아라크네가 살아 있는 한 기득권에 대한 위협과 도전이 계속될 것임을. 그래서 서둘러 조기진압을 했어야 했다. 아라크네의 존엄자살을 허용하는 것은 그녀를 레전드로 만들 것이므로, 격을 떨어뜨려 거미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기록자를 불러 경고의 차원에서 이 글을 남겼을 것이다. 아라크네는 그렇게 일벌백계의 참조자료가 되어버렸다.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점, 깨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절대 파워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영웅이라는 호칭에 적합하다.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만하게’ 신에게 도전한 아라크네는 복권되어야 마땅하다. 그녀는 신화에서조차 차별받은 여성 아티스트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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