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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직업을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칭해 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을 눈앞에 두고 이 호칭이 자신의 활동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는 위화감을 느끼는 디자이너도 적지 않으리라.
_ 하라 켄야, 디자인의 디자인
이력서를 쓸 때마다 내 직종은 한결같이 디자이너였다. 못해도 10년을 디자이너로 회사에서 일했고 직딩이 아니었던 시간에도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프리랜서로 일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아니 점점 더 어색해지는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디자인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예전에 갖고 있던 생각들은 하나둘씩 깨어지고 있다. 연차가 있다고 해서 그 일을 잘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고 다른 영역들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 속에서 디자이너라고 당당히 나서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한 것은 만약 디자이너로 일하지 않았다면 이런 취향을 갖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여태까지의 경험 덕에 지금의 수준이라도 되지 않았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동안 갖게 된 취향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사실 취향이라고 하긴 뭐하다. "이게 좋아"라기보다는 "이거 아니면 안 돼"로 기울다 보니 차라리 운동선수들이 갖는 징크스에 가깝다고 할까. 가끔은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내가 힘들다. 이게 뭐라고. 이 작은 게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도 그것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온 신경이 쏠려 가실가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맞추기 위해 그동안 날린 돈이 얼마며 보낸 시간이 얼마던가. 그걸 다 쓰고 마음에 드는 것을 장착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이것저것 사서 써보고 "이건 아니잖아!"한 경우 역시 부지기수이니. 이것을 디자이너의 취향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까칠한 인간의 낭비벽으로 끝내고 마는 것은 조금 속상하다.
디자이너의 취향. 앞으로는 수식어가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