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많이 아팠다. 기다시피 병원에 갔다. 위경련이었다. 가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된 것일까.
나를 잃어버렸던 시기가 몇 번 있었다. 첫 회사를 그만두며 병을 얻었을 때. 임용 공부를 하며 독서실에 박혀 지냈을 때. 또 아이를 기르며. 지나고 보니 삶이 변화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독히 앓았다. 감정을 예민하게 읽는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지금에야 생각한다.
나 자신과 멀어지는 시기. 그런 시기가 오면 몇 년의 시간이 그냥 흘러갔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면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되어 있는 거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하고, 웃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더듬더듬 다시 나로 돌아간다.
<코끼리 실험>이라는 글을 쓰면서 긴 시간을 더듬었다. 내가 어떤 엄마인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코끼리 실험>이라는 제목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교육학 용어에서 시작되었다. 코끼리들이 성체가 되어서도 우리를 부수지 않는 이유, 묶인 줄을 풀지 않는 이유는 어릴 때 어떻게 해보아도 줄이 풀리지 않았던 경험 때문이라는 이론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내게 이 '코끼리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미로 지은 제목이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내가 평생 피할 수 없는 선고가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장애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내가 하지 못한 일들에 나는 늘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실험'은 평생 지속될 것이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게다가 엄마로서의 나는 낙제를 겨우 면한 점수라 해도, 내게는 여러 모습이 있다. 그 모습들도 역시 실험을 거치고 있다. 내 삶의 실험은 글을 통해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미리 에필로그를 써 둔다.
뭣이 / 강여자
고구마 사세요
그 말이 부끄러워
선 채로 다 가져가게 두었다
서른의 엄마는
마흔의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도둑질했냐
뭣이 창피해
투박한 말이
나는
부끄러웠다
지 손자 지가 키우는데 뭣이 고마워
애기 걱정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우리 손자 손 한 번 더 잡아 주고 가려고
일흔에 엄마는 잊을 만하면 나를 울렸다
뭣이 이래―
남 하는 말 빼먹지 않던 사춘기 딸은
엄마처럼 안 산다던 못난 말 쏙 주워 담고는
엄마처럼 단단하게
아이 지키며
내 할 일 쏙쏙 해내는 그런 사람 되어야 한다,
오늘의
말 항아리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