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

by 강여자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손에 닿지 않아서는 아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지 상상하면 늘 마음이 버석거린다 좀 더 신중했다면 아직 연락이 닿을까 자주 생각한다 그때 왜 그렇게 성급했을까 바다 건너 떠난 그의 프로필엔 비행운이 있었다


그가 선물한 컵의 이가 나갔다 그 컵을 어쩌지 못하고 오가며 그를 보듯이 본다 지워지지 않는 1을 보듯이 본다 컵에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렀다가, 너를, 보내야 하나 몇 번씩 생각할 뿐 차마 어쩌지 못하고 오가며 보았다


오늘 책방에 어르신 한 분이 곱게 싸인 꽃을 들고 오셨다 눈매에 시선이 붙들린 채 '낯이 익어요' 했더니 'S...' 하셔서, 눈물이 왈칵 났다 D를 닮은 D의 어머니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그 고운 아이가,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그 소식을 어머니께 전했나 지금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이 장면 안으로 보내지 못했으리라 오늘 어머니가 D를 닮은 꽃을 안고 책방에 오셨다


「개업을 축하합니다」 전문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누구에게든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 같은 유형을 '인간 리트리버'라고 한다던데 그간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사람이다, 사람~'하는 밈은 웃프기만 하다.



아이들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엄마가 있었다. 발달 센터 대기실에서 책을 읽고 그날그날 아이들을 가르칠 교구를 만드는 착실한 그가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대학원을 다닐 때라 늘 바빴고, 인사만 하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곤 했다. 그러다 그가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함께 공부하자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동력이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빈말을 유난히 싫어한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아프다거나 중요한 시험이 있어도 가급적이면 취소하지 않는다. 내가 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네 명의 엄마들이 모이게 됐다.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던 그의 출국 시기가 석 달 후로 늦춰지면서 우리는 꽤 깊은 정을 나누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나누지 못했던 생각들을 꺼내놓았다. 끝이 예고되어 있어서 감정의 밀도가 더 높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 떠난 뒤 얼마간 우리는 줌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끝이 예고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만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둘 늘어났다. 내게 문제 되지 않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이해하려 애썼지만, 어차피 타인은 완전히 이해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였다.



어느 날부터 단톡방의 1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1이 아파서 한 계절을 앓았다. 왜냐고 묻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기억을 생으로 꿀꺽 삼켰다. 썸을 탈 때는 매일 볼 수 있는 사소한 물건을 선물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떠날 때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 그때 생각했다. 어느 날 D가 선물해 준 컵의 이가 나갔다. 버리지도 못하고, 볼 때마다 중얼거렸다. 이 컵을 보내듯 너를, 그만 보내야 하나.



한 시절이 끝난 것이다.



시절 인연. 한 시절 인연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 가끔 떠오르는 단어이다. 내가 유추한 뜻은 '한 시절 인연'에 가깝지만, 실은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아주 드문 일을 가리킨다.



이번 학기에도 글쓰기 수업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같이 공부하고 밥을 먹으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다 또 한 친구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자연히 그가 떠올랐다. 아니, 시절 인연을 함께 보냈던 몇몇 얼굴들이 스쳤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시절은 그렇게 또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오지 않을 어떤 시절이고 인연이었다. 기왕에 지나갈 시간이라면, 조금 더 떠들썩하게 보내기로 했다. 그 시간이 온통 흩어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꼭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참 재밌었다. 그지?



메시지 하나, 전화 한 통 없던 그가 저를 꼭 닮은 꽃과 어머니를 내게 보냈을 때 나는 혼자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함께 깔깔대던 그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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