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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Jan 15. 2020

주변인이 건넨 칭찬도
달게 받을 줄 안다면

책 <와일드>와 영화 <미스틱 피자>

그냥 누군가가 정해놓은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하지만 새해를 앞두면 괜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연말이면 우리 가족은 어떤 의식을 치르듯 식탁에 둘러 앉았다. 테이블 한 가운데에 필기구와 약간의 색연필,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 같은 문구류를 올려 두고 빳빳한 새 A4용지를  한 장씩 나눠가졌다. (여러 종류의 펜을 써보길 좋아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나와 동생은 역시 펜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무렵에 식탁에 올라오는 펜은 해가 갈수록 더 종류가 많아지곤 했다.) 새해에 이루고 싶은 것과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각자 종이에 적은 다음 알록달록하게 꾸몄다. 그 다음 가족들에게 내 새해 목표를 발표했다. 종이는 한 해 동안 잘 가지고 있다가 다음 연말이면 꺼내어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바쁜 와중에도 우리 자매의 행복에 가까이 서서 귀 기울이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휴가 일정을 맞춰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가족이 함께 하는 특별한 행사를 몇 개씩 만들어 두기도 했다. 쉽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착한 어린이로 지내려고 노력하던 것은 내년 이 맘 때 가족들에게 나의 한 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우리 자매의 희망에 호응하여 우리 가족은 각자가 보고하는 업적에 대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넉넉하게 칭찬을 내어주곤 했다. 


따뜻한 가족의 관심의 좋은 영향이 오래 지속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이미 난 좋은 것 보다 싫은 게 많은 심술쟁이가 되어 있었다. 일 년에 고작 한 시간 남짓한 이 시간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손 발 오글거리는 행사는 결국 우리를 한 해 동안 목표만 바라보게 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살게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학 생활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난 나는 더 이상 연말에 고향을 찾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온갖 칭찬이 몸을 휘감아 간질이던 시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목표에 번호를 매기고 스티커로 알록달록 꾸민 종이 대신 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당시 나는 더 넓은 도시로 나온 덕에 곁눈질 할 또래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또래에 그치지 않았다. 학년 별로 나뉘어 경쟁하던 학생 시절을 벗어나자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상상도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곳에서 나타나 각자의 달리기를 하고 있었기에 구경만 하고 있기에도 시간은 잘 갔다. 훌륭한 선수들의 경기를 하염없이 구경하던 나는 이내 덩달아 내달렸다. 앞서나가는 자들을 볼 때면 속이 쓰렸지만 그 자극이 또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다. 소박한 재료로 슴슴하게 간한 음식만 먹다 처음으로 가루 스프를 다 털어넣고 끓인 라면을 맛본 것처럼 나는 본격적으로 그 짜릿함에 몸을 내던졌다. 질투는 나의 힘이었고 질타는 박차를 가하기 좋은 핑계가 되었다.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대신 그날그날 닥친 일을 숨 가쁘게 해치웠다. 상냥한 과거는 어느새 유약함의 상징이 되었고 나는 안온한 나를 떨쳐버리기라도 해야되는 양 거친 환경에 스스로를 세워두곤 했다. 

4285km에 달하는 ‘진짜’ 거친 길 앞에 20kg의 배낭을 메고 선 자가 있다. 책 <와일드>를 쓴 셰릴이다.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으며 그녀는 꽁꽁 막아둔 기억을 힘겹게 꺼낸다. 만화 속 뚜껑 열린 마법 약병에서 약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오듯 셰릴의 과거는 552페이지에 걸쳐 멈추지 않는다. 술만 마시면 우악스럽게 변하던 아버지와 그럼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엄마, 사랑하던 엄마의 죽음, 그로 인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 생각은 앞 뒤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그녀의 걸음걸음을 사로잡는다.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나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셰릴은 이혼을 결정했고, 미처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폭염과 폭설, 들판과 사막, 방울뱀과 곰이 있는 길에 혼자 섰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억지로 씹어 삼켜야 해.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만들어야 해.

- 책 <와일드> 중


무의미한 하루하루가 모여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될 거야. 거지 같은 직장 생활, 일기를 쓰는 시간, 정처 없이 길을 헤매는 것, 시와 소설과 죽은 사람들의 일기를 읽고, 신과 섹스에 대해 고민하며, 겨드랑이 털을 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바로 너 자신이 될 거야. 

- 책 <와일드> 중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내게 과장을 좀 보태자면 사는 일은 종종 PCT를 걷는 셰릴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정도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어느 상황에서도 보란듯이 날 배신했다. 어쩜 그리 뜻밖의 일을 꽁꽁 잘 숨겨두었는지 누군가 이 상황을 몰래카메라로 만들었다면 그 창의력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의 날들이 이어졌다. 저자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 <와일드>는 저자 셰릴이 마흔 세 살에 발매되었다. PCT를 걸었을 때 그녀는 스물 여섯 살이었기에, 책이 십 몇 년에 걸쳐 쓰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극한의 경험이라 할 만한 일을 겪었다 해도, 새로운 도시에서 삶을 다시 꾸리고 책을 만들어 내기까지 삶은 극적으로 좋아지리란 법은 없나 보다. 부모님 품에서 뛰쳐나와 ‘이것이 진정한 세상이구나’ 감탄하던 내게도 드라마틱하게 이 전과 다른 삶이 펼쳐지리란 법은 없었다. ‘입에 쓴 약은 몸에 좋다’는 말처럼 씁쓸하고 떨떠름한 경험과 시간이 유익할 것이라 믿었다. 어려워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도전이라 여겼으며, 부드럽게 전하는 덕담보다 삿대질을 동반한 꾸짖음이 진정 나를 위한 소리라 생각했다. 나를 알던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진짜일 것 같아 학교를 떠나서 낯선 길에 섰을 때는 가족, 친구들의 연락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며칠씩 묵혔다 대답하기도 했다. 


더그가 준 깃털 ‘까마귀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깃털이 정말 어떤 상징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 의미가 바뀌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어떤 존재를 아주 열정적으로 믿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다. 회의적이면서 동시에 뭔가를 열심히 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둘 곳이 있기나 한지, 아니면 도대체 그 믿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너무 복잡해서 잘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진짜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짜처럼 보이기도 했다.

- 책 <와일드> 중


대단한 모험가라도 된 듯 한참을 맵고 짠 길만 걷다 보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설탕을 커다랗게 불려 만든 것이 솜사탕이지만, 달고 폭신하다고 거짓일 건 없지 않나. 연말을 맞아 긴 휴가를 얻게 된 김에 고향에 내려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모임에도 참석했다. 옛날 얘기와 근황 토크 뿐인 대화가 영양가 없다 생각한 지난 나는 얼마나 건방졌는가. 너의 올해는 망하지 않았냐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 강아지가 핥고 간 것처럼 미적지근한 칭찬으로 범벅되는 일도 없었다. 과거를 뒤로했다며 근 몇 년 유난을 떤 건 나 혼자의 일이었다. 

미국의 작은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데이지, 캣, 조조 세 소녀가 등장하는 영화 <미스틱 피자>를 보면 가족과 친구가 건낸 따뜻한 말이 그동안 어떻게 날 나아가게 했는지 기억하게 된다. 줄리아 로버츠와 맷 데이먼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19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빈티지한 색감이 마치 미화된 과거를 여행하는 듯 하다. ‘미스틱 피자’에는 특별한 비법으로 피자를 만들어 내는  사장님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 주인공이 일하고 있다. “은퇴할 시점에 너희 중 한 명에게 소스의 비밀을 알려주고 떠날거야.”라 말하는 사장님과 세 아르바이트의 사이는 각별하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만큼 하나라도 달라지면 금방 눈치를 챈다.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친구에게 조조가 실연당했을 때도, 유부남과 캣이 사랑에 빠졌을 때도, 가게에 유명한 음식 비평가가 방문했을 때도 그렇다. 유난스러운 태도로 비평가는 얘기한다. “여기 가장 맛있는 걸 좀 추천해봐요.” 캣은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평소와 같은 말투와 표정을 짓는다.”네. 스페셜 피자를 추천해드려요. 세상에 둘도 없는 맛이에요.” 

아빠다운 아빠든 친구같은 엄마든 형제같은 친구 또는 친구같은 자매든 소중한 단어로 비유할 수 있는 사람은 소중하다. 그들이 내어주는 말 역시 소중한 것이다. “그 때 그 일 있을 때, 얘 일본에서 귀국했었잖아. 심지어 12월 31일 연말이었어. 그 때 주머니에 쑥 넣어주던 편지를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열 번은 거듭 얘기했을 옛 얘기에도, “난 너 하나는 인정이다. 나 얘는 인정해!”라며 대체 뭘 인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반복해서 하는 얘기에도, “열심히 하는 애야. 성실하고 그러니 잘할 수밖에 없는 애지.”처럼 추천사에 가까운 얘기에도 뜨거운 애정이 뭉클뭉클 담겨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걸로 성공이라 생각했다. 또 남이 주는 당근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오직 내가 스스로 내게 가하는 박차만이 발전을 이뤄낼 것 같았다. 세상을 사는 데 뭐가 정답인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모두는 아주 많은 사랑을 거쳐 자라왔으며,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받으며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해냈다는 사실 외에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은 없었다. 내가 정말로 해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 책 <와일드> 중




<와일드(Wild)>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 

역자: 우진하

출판사: 나무의 철학

출판일: 2012.10.20

552 페이지



<미스틱 피자>

감독: 도날드 페트리

국내 개봉일: 1990.02.03 (1988년 작)

국가: 미국

상영 시간: 103분

장르: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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