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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Jan 15. 2020

이러나저러나 아까워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는 걸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와 영화 <왓 이프(What If)>

큰 일을 앞두고 사람들은 사주를 본다.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거나, 심경의 변화가 생겼거나 어떤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 사주를 보는 일과 머리를 바꾸는 일은 사람들이 변화를 마주하기 전 호흡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일인가보다. 홍대에는 두 가지 행위를 묶어 사주를 봐 준 다음, 그에 맞는 머리를 해 주는 미용실도 있다. 

            이번 달에는 왠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이나 미용실을 찾았다. 일 년에 기껏해야 세 번쯤 찾던 곳을 보름 남짓한 기간에 한 번씩 들르느라 머리가 귀 밑을 겨우 넘는 짧은 기장이 되었다. 작년 가을, 나는 미용실에 ‘아무렇게나 어울리게’를 요청했다. 걸을 때면 뚜껑 부분이 폴짝폴짝 가볍게 춤을 추는 숏 커트 스타일링으로 머쓱하게 미용실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그런 다음 일 년이 지났다. 지난 일 년간 나는 계속 머리를 길렀다. 그리고 그동안 자주 고민했다. 어깨 넘어까지 기른 이 머리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풍성하게 펌을 넣어 성숙해 보이는 머리를 할까, 층을 잔뜩 내서 가벼워 보이는 머리를 할까, 일자 단발을 한 다음 발랄하게 탈색 머리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이대로 조금 더 참고 길러서 허리까지 하늘하늘 닿을 수 있게 할까. 무작정 기느라 방금 씻고 나와서도 머리를 묶어야 할만큼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 스타일링이 정해지기 전까지 나는 머리를 따로 다듬거나 손보지 않았다. 몇 달을 머리를 질끈 묶은 채 폭발하는 잔머리를 헤어밴드로 꼭꼭 감춰가며 그렇게 꿋꿋이 머리카락이 길기를 기다렸다.  

            머리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할 수 있는 스타일링은 더 많아진다. 많아진 선택지만큼 고민의 시간도 길어진다. 이 때까지 길어온 게 아쉬워 막상 손대기가 아쉬워지는 것이다. 파마나 탈색을 하면 애써 기른 머리가 상할 것이고, 층을 내면 다시 일자로 기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싹둑 자르자니 또 머리를 기느라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깝다. 이러나 저러나 아까워하느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아까워할거면 애초에 머리를 기르지나 말 걸 그랬다. 

            아까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마음은 묘하게 익숙하다. 생각해보니 이 지지부진한 진행 과정 그 자체가 날 닮아 있었다. 20대 초반 엉겁결에 스펙 싸움에 뛰어 들었다. 얼떨결에 뛰어든 것 치고 열렬했다. 4년 남짓한 시간동안 대외활동을 무려 52개나 했고, 동아리 활동을 한답시고 태권도장을 맨발로 뛰어 다니다가,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생회 활동을 했으며,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가 베트남으로 해외 인턴을 다녀왔다. 그 사이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강의라면 학교 안이든 밖이든 쫓아다녔다. 커피 머신 회사에서 학생 마케터로 일하다가 신사동의 카페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된 나는 하루하루 배우는 게 많아 즐거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그동안 공부하고 배워온 것들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다는 걸 아까워했다. 대형 연예 기획사에 면접을 봤다가 도쿄의 마케팅 회사에 취직을 했다. 어디에도 쉽게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배워둔 것들을 맘껏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가진 모든 능력을 동시에 쓸 수 없어 아까워할 바에야 아무 능력도 없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내가 가진 그 능력들은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제목부터 구질구질하게 ‘만약에’를 가정하는 영화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아쉬워하고, 생기지도 않을 미래를 곱씹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아까워하는 영화 <왓 이프>다. 남자 주인공 월레스는 파티에서 샨트리에게 첫 눈에 반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5년이나 사귄 번듯한 남자친구가 있다. 쿨하게 친구로 지내기로 해 놓고 둘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추억을 나눈다. 선을 넘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동화에선 사랑이 숭고함과 용기로 포장되지만, 현실의 사랑은 이기적인 행동의 변명일 뿐이야.”

- 영화<왓 이프> 중


“실제로 닥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망가지는 지 모를거야.”

- 영화<왓 이프> 중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듯한 단어들로 문장을 구성해가며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둘의 관계가 사랑이 아님을 주장한다. 월레스의 친구인 알렌과 니콜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을 재가며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공들과 달리 화끈하다. 첫 눈에 반해 사랑을 나누고,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뜨겁게 사귀다가 약혼식에서 흥에 겨워 그 자리에서 결혼을 발표해버리는 사람이다. 


“네가 너무너무 좋아서 살갗을 모조리 벗기고 조각조각내서 내 핸드백 속에 넣어 다니고 싶어.”

- 영화 <왓 이프> 중


“모든 사랑은 복잡해. 하지만 그래서 좋은거야. 너무 쉬운 건 도전할 이유가 없거든. 그리고 도전할 이유가 없으면 할 필요도 없지.”

- 영화 <왓 이프> 중


            그 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이랬다면 어떨까 고민하지만, 그 때 그렇게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머리를 자르기 전에 이 머리가 내게 어울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자료를 많이 검색하고 오랜시간 고민해 볼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그 머리를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사진만 들고 미용실을 찾으면 ‘손님, 이건 고데기에요’ ‘손님 이건 전지현이잖아요.’라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다. 가끔 내게 어울리는 머리를 누군가 결정해서 알려주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누가 결정해 준 머리를 하고 나면 이 헤어 디자이너보다 능력있는 디자이너가 있을까 찾아볼 게 분명하다. 단번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게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인지 판별할 방법이 없다. 또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계속 내게 그 스타일이 어울릴 거라는 보장이 없다. 나이와 트렌드는 계속 변할 것이다.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는 어울리는 머리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는 게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이며,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서 이 생각은 가능성이 없다. 명심해야 한다. 내가 첫 단추를 제대로 꿸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객관성으로 말해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대신 이렇게 믿고 싶다. 나는 인생의 중간 어딘가에서 힘드릭도 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할 테지만, 인생의 전체 큰 틀에서 본다면 분명 운이 좋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엄밀히 말해서 그런 일은 없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당신만이 운이 좋을 리 없다.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들이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나약해서다. 현실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세계의 복잡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이들은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 분명해 보이는 것을 선태하고 이것에 집중하겠다는 단순한 전략을 세운다.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


한번에 어울리는 머리를 찾지 못한 것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 같은 머리를 찾았을 때 그 머리 스타일을 쭉 유지하지 못한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이 책을 읽으며 또렷해졌다. 마음도 편해졌다. 세계는 이렇게나 복잡한데 나만 단순하게 모든 게 정리된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닌가. 영화 <왓 이프>에서 역시 변수는 계속 된다. 회사에서 승진 제안을 받은 샨트리는 대만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고민을 한다. 그리고 장거리 연애에 자신이 없단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 친구는 승진을 해 더블린으로 떠난다. 내가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데는 내 능력 밖인 때가 많다. 내가 계획하고 움직이는 동안 세상도 역시 계속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주로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영화 상영 시간 동안 스크린 가득 펼쳐진 캐나다 토론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 곳과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일본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두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일단 둘 다 신청해두고 먼저 비자가 나오는 곳으로 가자고 마음을 먹었고, 일본 비자가 먼저 나왔다. 나는 도쿄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캐나다에 갔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 본다. 색다른 배경 속에서 난생 처음인 경험을 잔뜩 했겠지. 생각은 해 볼 수 있지만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후회를 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다. 


“혼자 막 상상했었는데, 타임머신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난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밤으로 돌아갈거야.”

“그 때로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게 뭔데?”

“없어.”

- 영화 <왓 이프> 중


본전 생각에 이것도 저것도 맘껏 몰입하지 못한 탓에 어딘가 이력서를 낼 때면 민망해진다. 직장을 자주 옮기는 건 끈기가 없어서라는 꼬리표가 자주 붙기 마련이다. 단 한번도 긴 생머리를 해보지 못했다. 직장 바꾸듯 머리 스타일에 자주 싫증이 나기도 했고, 금새 다른 머리로 바꾸고 나야 마음이 좀 편해지곤 했다. 


반대로 당신이 자신을 아끼면서 이곳까지 왔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걸어오는 동안 발견한 풍경들을 감상하며 이곳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걸을 것인가, 쉴 것인가,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


머리가 기는 시간을 차분히 기다리지 못해 긴 생머리를 못해본 걸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긴 생머리만 빼고 마음 가는 대로 거의 모든 헤어 스타일을 다 해봤다고. 이제는 시기별로 어떤 머리를 하면 좋을지 설핏 떠오르기도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짧고 가벼워진 머리처럼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 했다. 


당신 앞에 세상은 하나의 좁은 길이 아니라 들판처럼 열려있고, 당신이 보아야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목표점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서 있는 그 들판이다. 발 아래 풀꽃들과 주위의 나비들과 시원해진 바람과 풍경들. 이제 여행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볼 시간이다.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작가: 채사장

출판사: 웨일북(whalebooks)

출판일: 2017.12.24


<왓 이프(What If)>

감독: 마이클 도즈

상영시간: 97분

개봉일: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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