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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Oct 27. 2019

그냥 묵묵히 내가 재밌는 일, 할게요.

영화<마이크롭 앤 가솔린>과 책<식물산책>

‘지쳤다’는 표현이 몸과 마음에 모두 어울리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 지점을 현명하게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폭삭!하고 늙어버린 기분이 들 때면 좋은 책을 양껏 읽고, 땀을 흠뻑 쏟도록 운동을 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 배를 잡고 웃어보면 좀 나아질 것도 같다. 그러면 당연히 좋겠지만, 이런 도덕책 속 해결 방안이 언제나 통하진 않는다. 살다보면 날 힘들게 하는 일은 거의 매일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고, 내가 집어들어 읽기 시작한 책이 매번 그럴싸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거나, 친구들을 만났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은 자리일 때도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행을 미리 대비하여 오지 않도록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인생의 어떤 우울한 면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뛰어넘는 두 소년을 마주쳤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아서 '마이크롭(미생물)'이라 불리는 다니엘과 기름 냄새가 온 몸에 풍겨서 '가솔린(휘발유)'이라 놀림 받는 테오. 이 섬세한 예술가와 괴상한 기술자는 또래 친구들에게 무시 받느라 학교 생활이 그다지 즐겁지 못하다. 심지어 집에서도 가족 관계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은 좌절하거나 슬픔에 잠겨있지는 않다. 낡은 잔디깎이 기계 모터에 잡다한 부품을 모아 집 모양을 한 자동차를 만들어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니까.

동화같은 아기자기한 장면과 영상미로 유명한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장면장면을 화려하게 꾸며냈다. 정작 내가 주목한 장면은 오직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부품을 모으는 두 소년의 모습이었다. '언제나'를 나타내는 식상한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둘은 정말 텍스트 그대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쓸만한 쓰레기를 모으러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영화는 한참을 그들이 쓰레기를 줏으러 다니는 장면만을 비춘다. 


"저 머저리들 신경쓰지마."

"우리가 미래를 혼쭐 내 주는 거야."

   - 영화<마이크롭 앤 가솔린> 중


배경과 옷만 바뀌고 줍는 쓰레기가 바뀔 뿐 둘은 계속 버려진 물건을 찾아다닌다. 분명 모두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주어지고 두 끼에서 네 끼 사이의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고, 집에서 뭔가 거북한 이야기도 나누었을텐데 다니엘과 테오는 마치 내내 쓰레기를 뒤지기만, 아니 부품을 찾기만 하는 것처럼 장면이 편집되어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래퍼 허클베리 피의 말대로 그 누구의 삶도 흰 면만 덩그러니 있진 않다. 우리 모두는 달마시안처럼 어떤 일을 겪은 다음에는 어떤 무늬를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살아가는 하루 역시 같다. 한 가지 색깔로 단조롭게 이루어진 하루는 없다. 그러나 그다지 쓸 데 없는 장면은 모조리 편집하고 자동차 부품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는 장면만 영화에 사용된 것처럼 모든 시간과 그 시간 속에 벌어진 사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건들은 그러려니 뒤로 밀어내고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일만 들여다보면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과 직업으로 선택한 일의 일치를 꿈꾸던 나는 자주 일에 매몰되어 경주마처럼 그저 앞만 보고 힘차게 달리곤 했다. 그렇게 주변은 둘러보지 않고 앞만 바라봤으면 좋았을텐데, 주변 환경의 변화는 내게 다리에 마취 총을 맞은 듯 푹 고꾸라질 원인을 제공하곤 했다. 아주 작은 변화마저도 그랬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바뀐다던가, “이건 좀 별로지 않아?”라는 지적을 받는다던가, 어젯밤 잠을 못 이뤘다거나 하는 일 같은 것들. 심지어 “그 사람 일 진짜 못하더라.”라는 뒷담화까지 내가 사정없이 흔들릴만한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자주 흔들리다 보니 이 일이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인지, 계속 해 나갈 순 있는 것인지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분명 즐거이 뛰어든 일이었음에도 과감하게 일에 몰입하고 집중하지 못한 탓에 비틀거렸다.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했다. 

 

책 <식물산책>의 저자 이소영은 식물 세밀화가다. 생소한 직업을 가진데다, 그녀의 일기를 들여다보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그녀는 당당하게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 있는 이 곳이 내가 원하던 더 넓고 큰 숲인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원하던 숲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서두르지도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꿋꿋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며 생장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까지 씨앗을 퍼뜨리고, 뿌리도 저만치 내뻗을 수 있다는 것을 광릉숲의 식물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책<식물 산책> 중에서



그녀는 그녀의 일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댓가는 얼마나 적은지,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중 다른 조직에 소속되길 선택한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동료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들은 내 직업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 따위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는 몸을 꼬아 고개를 이리저리 숙이고, 직접 잎을 돌려 포자낭군과 그 안의 포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뚜렷한 형태로 익은 포자들, 둥글거나, 긴 곡선이거나 직선이거나, 잎 전면을 사선으로 그은 듯한 포자낭군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희열같은 것이 차오른다. 눈으로만 관찰하다가, 사진을 찍거나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식물의 이름을 길게 나열해 적어본다. 이 온실에서만큼은 양치식물이 세상의 전부인 듯 느껴졌다. (중략) 언젠가는 양치식물들을 제대로 그리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내 양치식물 그림에선 축축한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그들이 모여 사는 숲과 온실에서 맡았던 그 냄새 말이다. "

   - 책 <식물산책> 중에서




의견이 다른 팀원에게 조건반사적으로 분노를 표하고, 지쳐 무기력해졌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방황하던 나는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주변 사람과 '가솔린' 그리고 세밀화가 이소영을 통해 비로소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부디 이 평화가 조금 시간을 끌어주어 내가 일에도 몰두하고 능력치도 쌓아나갈 수 있었으면 바란다. 비록 미래가 보장된 그럴듯한 직업은 아니지만, 아무리 둘러보고 돌이켜봐도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일이니까. 주변 식물을 관심있게 들여다보듯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애정을 가지고 둘러보고, 고장난 기계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생명을 불어넣듯 자칫 식상한 이야기에도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스쿠터는 어때?"

"그건 비싸기도 하고 멋지지가 않잖아."

-영화 <마이크롭 앤 가솔린> 중에서.




영화<마이크롭 앤 가솔린>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미셸 공드리 

개봉일: 2016. 03. 31




책<식물산책>

저자: 이소영

출판사: 글항아리

출판일: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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