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델타 보이즈>와 책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독립잡지 성향의 그래픽 디자인 매거진에서 아웃도어 패션 매거진으로 어쨌든 잡지를 만드는 일에 빠져 1년을 보냈다. 에디터란 직업은 콘텐츠를 다루는 동시에 기자이기도 하며 책 한 권을 기획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매력적인 일이었다. 긴 인생에서 가끔 1년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된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이 되는 동안 어떤 노력을 거쳐 뭘 어떻게 더 잘하게 되었는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이 일이 나의 꿈인 것 같다며 도쿄에서 서울로 되돌아 온 것도 1년 반이 꼬박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에 기억할 만한 사건이 하나씩만 일어났다고 해도 365개의 에피소드가 있었을 그 시간을 나는 가뿐하게 통과했다. 앞으로 학교 다닐 날을 적어도 12년은 앞둔 여덟 살짜리처럼 말이다. 인터뷰 전 날 밤잠을 못 이루는 날도 점점 없어졌고, 염소 목소리로 간신히 다음달 기획을 발표하는 일도 잦아들었다. ‘어차피 하향산업인 잡지에 이렇게까지 목 메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 있나? 아, 내일 회사 가기 귀찮다.’는 생각을 버젓이 입 밖에 내고, 종이의 무게를 가끔 잊기도 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건방져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오던 날 “엄마가 읽어보니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참 좋더라. 빌려 줄 테니 다 읽고 돌려줘.”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슬쩍 쳐다보니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실천편>이라는 구닥다리 제목을 하고 있었다. 타겟 층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힌 자기개발서 정도 일 것 같았다. 실천편이라고 쓰여진 걸 보니 다른 편도 있었나 보다. 고작해야 꿈을 포기하지 말라거나,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늘어서 있을 것만 같았다.
실패한 인생을 사는 어른들의 공통점은 젊은 시절 실패를 너무 적게 해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생각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현재에 고여 썩게 만들었다. 수십 년 후 실패한 인생으로 남고 싶지 않다면 지금 밖으로 나가 부지런히 실패하라. 실패의 교훈과 비례해서 얻게 될 크고 작은 성공의 경험들은 정확히 그 횟수만큼 당신을 남보다 앞서게 해줄 것이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중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조곤조곤 풀어져 쓰여 있었다. ‘몸 안 사리고 덤벼들었다가 나가 떨어지면 결국 내 손해’라는 생각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멋지게 나이 든 똑똑한 언니가 해주는 얘기에 나는 금새 귀를 기울였다. 난 그래도 아직 신입이고 선배가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내게 책임을 물 일은 없겠지. 가만히 중간만 가려는 애가 나였다니.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느슨해졌는지 빤히 내려다보여 부끄러워졌다. 이대로라면 고여 썩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 영화에서 그를 보았다. 얼굴이 다소 큰 편이라 어울릴 턱이 없는 덥수룩한 ‘김병지 컷’에 꾸역꾸역 입은 듯한 정장이 부담스러웠다. 대답 소리가 어찌나 크고 빠른지 내가 그의 앞에 있었다면 뒷걸음질을 쳤을 것이다. 그는 영화 <델타 보이즈>에서 사중창 연습을 하는 남자 ‘대용’이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현역으로 뛰는 축구선수 김병지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자 그는 꽁지머리를 고수한다고 말한다. 생선 가게에서 일하다가도 노래 연습을 하러 갈 때면 그는 꼭 양복을 빼 입는다. 옷이 그게 뭐냐며 누가 면박을 줘도 꿈에 대해 예의를 깍듯이 갖추듯 영화가 끝날 때까지 대용은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노래 연습을 한다.
잡지에는 매 달 도와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컨트리뷰터’란이 있다. 그 곳에서 에디터가 어떤 포토그래퍼에게 쓴 이런 글을 발견했다. “그는 몇 년을 했는데 대충이 없다”. 간절히 원하던 자리를 꿰어 차고 이제 시작점에 선 나는 얼마나 많은 하루들을 허투루 보냈던가. 비척비척 회사에서 스튜디오, 스튜디오에서 다시 집을 비척비척 왔다갔다 ‘어떻게든 되겠지’ 함부로 생각했는가. 매번 최선을 다하느라 떨고 긴장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많은 걸 휙 던져 두었는가. 경기장에 단단하게 선 나이 든 축구선수를 보며 가수가 꿈이라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반성했다는 대용처럼 나는 ‘대충이 없다’는 문장에서 멈춰 서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가벼워졌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영화 <델타 보이즈>에는 대용 외에도 사중창 대회에 나가기 위해 노래 연습을 하는 남자가 세 명이 더 나온다. 각자 캐릭터는 다르지만 각자 찌질하다. 애초에 팀을 꾸린 사람도,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도, 장사를 하느라 연습 시간을 내기 힘들어 볼멘 소리를 하며 오는 사람도 모두 그렇다.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은 멋지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하나의 기사가 책에 찍어 나오기까지 웅크리고 앉아 연습장에 무엇을 적고 그렸는지 보여질 필요가 없듯, 촬영장에만 들어서면 긴장해서 진땀 흘리는 내 모습이 남 보기에 우스꽝스러워 보이듯, 허둥지둥 서툰 나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대용이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던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준비 과정에 해당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았으면 한다. 한 번 하는 촬영이라도 능숙하게 프로처럼 해내고서 반짝이는 결과물만 툭 세상에 던져졌으면 했다. 그러나 찌질하고 궁색한 준비과정 없이 결과물이 휙 하고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괴리 사이에서 ‘아무래도 못하는 건 남 보기에 민망하니 열심히 하진 말아야겠다’를 또 택하진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 그 무렵 다시 가슴이 뛰는 일이 생겼다. 인터뷰를 했던 사람이 함께 항해를 떠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듣는 순간 당장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멋진 콘텐츠를 만들게 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내가 한 번도 건드려본 적이 없는 규모의 일이었고 선배 역시 손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 하고 싶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시작이라도 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시작을 했는데, 진행하는 일은 당연히 더 어려웠다.
사람들은 인생의 장애물이 너무나 버거워서 그 재앙을 자신이 불러들였다는 책임감과 수치심까지 감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나 여자들은 정확한 돌의 정체도 모른 채 자꾸만 ‘누가 나 대신 이걸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남의 인생에 놓인 돌에는 관심이 없고, 관심을 갖게 된다고 해도 그 일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중
영화에서 사중창 멤버 중 하나인 ‘일록’은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자해를 한다. 두 번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뺨을 때렸고, 한 번은 야구장에 가서 공을 맞고 서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그를 보며 나는 함께 씩씩댔다. 모처럼 꿈이 생겼는데, 연습실을 못 쓰게 되고, 일자리를 잃게 되고, 잠자리는 불편하고, 그렇게 등장하는 걸림돌은 끝이 없어 보인다. 책의 저자는 일단 작은 돌부터 치워보기를 권한다. 성공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앞의 돌을 스스로 망설임 없이 치우고서 전진한다고.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면 진정한 소신과 소신을 가장한 고집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고.
20대 여자들이 꿈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 ‘노력’이 그저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치열한 내면의 고민들이 노력이라면 차라리 노력하지 말라. 그저 마음 편하게 행동만 하라. 행동한 다음 나타나는 결과들이 저절로 고민을 해결해줄 것이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중
떠오른 아이디어가 머리를 뱅뱅 돌았다. 아직 때가 아니니 손에 쥐고 있는 것부터 완벽하게 소화해야 맞는 것 같아 없던 일로 하려다가도 지금이 한 발 성장할 기회인 것 같기도 했다. 고민을 한다고 앉아있지만 여기서 거기로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실행 가능성이 있는 기획인지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탓이라 생각하여 기획안부터 만들었다. 쓰다가 내가 ‘오 이건 안되겠는데.’라고 판단하여 포기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1년 차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빨아들이듯 성실하게 배우는 것 또는 마구 시도하고 언제든 실패하는 일이었다. 볼 장 다 봤다는 양 축 늘어져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보는 반짝반짝한 사람들의 결과물만 올려다보며 부러워 할 게 아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돈도 써봐야 잘 쓸 줄 알게 된다. 시장판과 다를 바 없는 80% 세일 행사장에서도 백화점 매장에서 산 것 같은 옷을 골라내는 여자들은 비싼 옷을 제값 주고 사보기도 한 여자들이고, 남들 100만원에 다녀오는 여행을 80만 원에 알짜로 다녀오는 여자들은 숱하게 돈을 쓰며 여행을 해본 여자들이다. 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안 쓰려고만 하면 자신이 정말 돈을 써야 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되고 돈을 안 쓸 수밖에 없는 삶 속에 갇히게 된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중
그럴듯한 외국 이름을 붙였지만 델타 보이즈 멤버 넷은 실패자들이다. 영화 <델타보이즈>는 루저의 이야기고 아마도 그들은 계속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음울하지 않다. 영화는 박수와 환호성을 남기고 끝난다. 뭐 하나 시원시원하게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지금, 지지부진한 오늘을 지나고 있지만, 꿈은 가진 자에게 반짝이는 소중한 것이니까.
꿈꾸지 않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없다. 꿈을 믿고 기억하는 데에는 ‘김칫국 마시기’만 한 것이 없다.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서 꿈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말 삶이 꿈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은 된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군가의 가치를 그 사람의 현재를 보고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중
이 원고는 하노이 한인 소식지 7월호 film&book 코너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