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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May 23. 2019

꼭 빈둥거려야 게으른 게 아니다

나 같이 늘 허둥지둥하는 사람이 게으른 경우도 있다

           꼭 빈둥거려야 게으른 것은 아니다. 둘러보면 세상 일은 혼자 다 하는 것 같은 분주한 사람이 “내가 게을러 빠져가지고~”로 시작하는 문장을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행동이 느리고 게으른 편인 것 같다. 해야겠다고 계획해 둔 일을 제 때 해내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반면 시끌벅적 노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늘 일도 밤 늦게까지 열심히 하며, 취미 생활까지 멋드러지게 틈틈히 즐기는 친구가 있다. 지드래곤이 군 복무를 하는 동안 그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저는 너무 게을러서 인생이 진도가 나가지 않아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는 게으르다고 종종 말하곤 하는 사람 세 명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곧 내가 아는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몸을 벌떡 일으켜 총총 걸음을 하며 움직인다면, 생각도 자연스레 몸의 템포를 맞추어 부지런해진다. 몸과 마음이 바지런히 일하다 마음이 몸을 앞선 때면, 자신을 내려다보며 ‘게으르다’고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게을러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부지런하느라 생긴 일이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너그럽게 얘기해서 호기심이 많고, 냉정하게 얘기해서 이력서가 띄엄띄엄인 나는 잡지를 만드는 편집자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매 달 새로운 주제를 잡아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세 달차 에디터인 나는 서서히 느슨해지고 있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민이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가설은 위와 같다. 내가 사실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고, 생각이 잠시 앞서나갔을 뿐이다. 이 설명은 조금 그럴듯하고 아주 뿌듯했다. 몇 달을 돌이켜보니 나는 늘 뭔가를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몹시 번잡스러웠다. 움직이고 있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얘기가 달라졌다. 중요한 일은 선뜻 시작하기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뒤로 하고선, 작고 사사로운 일에 대롱대롱 매달려 아등바등거렸다.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자는 마음에 결정은 자꾸만 미루어두고, 가야할 길을 선택하지 못한 채 같은 하루를 열고 닫는 일만 반복했다. 바빠 보이지만 실속은 없는 나는 ‘부지런떠는 게으름뱅이’가 아니었을까. 

          지루해지면 언제나처럼 또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면 될 일이지만, 이번엔 좀 더 붙들고 싶었다. 일본 취업 비자가 마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꿈을 찾아 한국으로 갓 들어왔을 뿐이었다. 미련없이 홀홀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고 또 그 일을 반복하는 건 내가 기꺼이 해 온 일이지만, 또한 어느 순간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 품을 떠나 서울에서, 하노이에서, 도쿄에서 사는 동안에 좀처럼 현실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며 어른거리는 걸 쫓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내게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은 성스럽기보다 지질했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처절한 시간 안에서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덕업일치(좋아하는 일과 직업을 같게 하는 것)’를 외쳤었다면, 이제 돈벌이와 경력을 위해서라도 직업을 좋아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자, 이제 무엇이 날 지탱하게 할 것인지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내보자.

           일이 조금 손에 익자마자 헐렁헐렁 건방져진 나에게 도전 과제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이 콘텐츠가 약세라면, 강세라고 알려진 영상 콘텐츠를 배워보자 싶었다. 힙합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감독님이 모집하고 있는 수업에 가진 돈을 모두 덜컥 들이 부었다. ‘초보라도 괜찮습니다.’라고 쓰여있던 그 수업은 사실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영상 작업자 중 감독으로 독립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들을만한 수업이었다. 나는 초보 축에도 들지 못했다. 매주 토요일 다섯 시간씩 진행되는 강의 시간이면 나는 알아듣고 수업을 따라가려고 용을 쓰다가, 무슨 소린지 모르더라도 일단 받아 적다가, 이내 탈진하듯 졸기 일쑤였다. 장소는 어떻게 섭외하고, 조명 감독은 어디서 구하고, 짐벌 워킹을 하는 방법은 무엇이고, 무슨 색을 입혀야 감성적인 장면이 나오는 것인지 배우면서도 긴가민가했다. 확실한 건, 영상 장비는 글쓰는 도구에 비해 엄청나게 필요한 게 많고 값이 비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상 일을 한다는 건 무지하게 복잡한 사건이 되는 듯 했다. 장소와 시간과 출연자를 정하고, 카메라와 카메라 화면을 잘 볼 수 있는 모니터, 평행을 맞춰주는 기계, 밝기 조절하는 조명을 빌려 온다. 그러다가도 하나만 삐꺽하면, 예를 들어 카메라 설정이 잘못되었다거나 출연자의 그 날 컨디션에 문제가 있다면 다시 다 끼워맞추거나 버려야 하는 일이 된다. 

           “하나 놓치면 연이어 문제가 발생해요. 마치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되죠. 하루에 대여료가 400만원인 카메라를 빌려 촬영을 했는데, 마이크 선이 잘 꽂히지 않아 녹음이 날 되지 않았다면? 그 순간 지옥 다녀오는 거에요. 전 지금도 두 세번 확인하고도 촬영할 때면 긴장이 돼요.” 

“’아니, 뭘 이정도로?’,’아니 이거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밀해야 해요.”

“’이걸 내가 왜 알아야 돼?’, ‘내가 이런 걸 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 치고, 잘 되는 경우를 못 봤어요. 여건이 된다면 그냥 그런 거 까지 다 알아두고 해 두세요. 손해보지 않아요.”

“평소에 취향을 차곡차곡 쌓아두어야 해요. 뮤직비디오 제안 받아서, 녹음해 놓은 노래 듣고 바로 영감이 떠올라 제작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갑자기 빵! 인기를 얻는 경우가 있죠. 흔치 않은 기회가 그 사람에게 온 거에요. 그런데 그 기회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럴 때 기초가 단단히 갖추어진 사람이 빛을 보는 거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주목받을 기회는 좋을 게 하나 없어요. 오히려 능력이 없단 걸 널리 알리게 될 뿐이죠.”



           과제로 뮤직비디오를 찍어 올 일은 늘 걱정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초보 아래에 있는 나라도 포기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다. 영상 수업보다도 때로는 인생을 알려주는 듯한 선생님의 에피소드를 듣는 일이 좋았다. 카메라 부품 회사에 다니던 선생님은 5년 전 쯤,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땐 돈이 너무 없어 마트에서 아내가 “자두 맛있겠다.”는 지나가는 말도 질겁하며 무서워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자두 안 무서워하고 사 먹을 정도는 된답니다.”라고 웃었다. 사진과 영상은 어차피 카메라를 다루는 비슷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선생님이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는 일은 어쩌면 영원히 발생하지 않을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는 어떤 신에서 다른 신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건, 곧 힘이 세다는 말이라고 했다. 카메라의 원리와 보기 좋은 구도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었다면,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일을 하는 나 역시 좋은 서사를 구성하여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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