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비트를 느껴봐>
주말이 왔지만 일 생각이 쉽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을 오래 하려면 일과 삶의 균형이 잘 맞아야 한다던데, 내겐 이 문제가 이중택일처럼 애초에 양립이 어려운 선택지였다. 트렌드라하면 앞구르기도 흔쾌히 하는 내게 몇 년째 전국이 '워라밸'로 들썩이는 동안 그 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건 큰 안타까움이었다. 왜 난 워라밸을 못 찾고 있는 걸까? 하나, 워라밸이 적합한 직종이 아니다. 둘, 워라밸을 누리기에 아직 이르다. 셋, 사실은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다.
나는 성장 영화를 좋아한다. 오합지졸이 모여 이룬 군대라 어설프기만 하던 사람들이 밤낮으로 장소를 불문하고 훈련을 하더니 금세 호흡을 맞추는 영화 <뮬란>의 장면이나, 공부와 담을 쌓은 채로 살아왔지만 목표가 생겨 책을 쌓아두고 코피를 흘려가며 문제를 풀더니 괄목할 성장을 이뤄내는 <내 사랑 싸가지>의 장면은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힘이 불끈 솟는다. 일본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테라스하우스: 도시남녀>에 등장한 발레 선생님은 프로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프로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발레에 자기 인생을 모두 거느냐 마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해. 하루 24시간을 발레에 도움되는 일만 해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 내가 더 마음 깊숙이 기억해 둘 만한 이야기였다.
연애를 할 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다. 일에 있어서 내가 그랬다. 일이 좋아 주로 내 쪽에서 먼저 굽신거렸다. 뭔가가 소중해서 지키고 싶은 마음이 괜한 오버액션을 만들어냈다. 다른 얘기보다도 '일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게 가장 무서웠다. 일을 하다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내 실수가 아니여도 일단 먼저 사과를 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꼭 찝어 사과하거나, 상황이 잘 풀리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정도에서 끝났어야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랬다. ‘이런 상황이 되어 미안해. 하지만 난 더 잘할 수 있었어. 잘못했어. 한 번 더 기회를 줘.’ 말 그대로 애걸복걸이었다. 그 일로 돈을 벌면 프로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프로다워야 했다. 당당하면서도 도도해야 했고, 그러려면 맡은 바 책임을 잘 해내야 했다. 아니, 근데 그렇게 되려면 24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데?
영화 <비트를 느껴봐>의 주인공 에이프릴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댄서다. 열심히 할 뿐 아니라 잘 해내는 것이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인 프로 댄서. 고향에 내려갔다가 그는 자신의 첫 발레 선생님을 마트에서 만난다. 얼떨결에 선생님의 등살에 떠밀려 발레 수업에 들어가게 된다. 방과 후 태권도장 같은 자유분방한 발레 교실 분위기 속에서 한 학생은 에이프릴에게 어떻게 브로드웨이에 갈 수 있는지 묻는다. 이에 에이프릴의 답변은 싸늘하다.
“어떻게 해야 브로드웨이에 가는지 정말 궁금해? 간단해. 중요한 사람들 앞에서 절대 실수하면 안돼. 절대로. 하지만 말이야,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누구 앞에서든 실수를 하면 안돼.”
- 영화 <비트를 느껴봐> 중에서
떠밀리듯 아이들을 데리고 대회에 나가게 된 에이프릴은 프로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에 몰아붙였던 것처럼 팀원들을 다그친다. 이렇게 에이프릴이 어떤 연습에도 타협하지 않고 혹독하게 지내왔을 삶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이러고도 댄서야? 아니면 그냥 여자애들이야?”
“우린 그냥 여자애들인데요.”
-영화 <비트를 느껴봐> 중에서
에이프릴이 아는 건 몰아붙이는 일 뿐이다. 이유도 방법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길이 답이라 생각하면 곧장 그 길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걷는 것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평소보다 열심히 하고도 혼나기만 해야하는 수업 방식에 지친다.
“몇 번을 얘기해? 집에서도 연습을 해야 한다고.”
- 영화 <비트를 느껴봐> 중에서
발레단 아이들이 프로의 책임감을 배우는 동안, 에이프릴은 일과 삶을 함께 사는 법을 배워 나간다. 에이프릴은 그 동안 자기가 만든 기준에 스스로가 갇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아이들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공원에서도 놀다가도 춤 생각에 몰두한다.
일에 몰입하는 삶을 꿈꾸지만 나는 ‘놀토’를 지나 주5일제의 삶을 살아온 밀레니얼이다. 그만큼 퇴근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거나, 휴무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종종 퇴근 시간을 딱 맞춰 자리를 떠나는 동료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급한 업무 얘기를 나눌 때 스케줄이 안된다고 말하는 동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도 “야근이 잦네요”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눈치가 보였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사무실 분위기를 흐린 것 같아 노트북을 싸들고 집에 갔다.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인 워라밸은 단 세글자 뿐이지만 아주 애매하고 이뤄내기 복잡스러운 일이다. 내가 성에 안 찰때면 책임감을 말했고, 남이 책임감을 말하려 할 때면 워라밸을 들먹였다. 내가 퇴근할 때는 워라밸이었고, 남이 퇴근하면 일을 남겨두고 퇴근하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처럼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 얼마든지 모양을 바꿨다.
그러므로 워라밸의 기준은 내 안에 있으면 그만이다. 남에게 들이댈 필요도 없고, 들이대는 순간 ‘꼰대’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삶의 패턴을 돌아보자면 하루 8시간을 일하고, 주말엔 놀았다. 이렇게 살 때 내 삶을 살 시간은 충분했다. 쉬는 동안에도 일 생각을 한다고 워라밸을 따진 건 불평에 지나지 않았다. 워라밸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워라밸을 흔쾌히 깨뜨린 프로들을 동경하며.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