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가에 대해 농담하기 끔찍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병을 보고 치료하기에 끔찍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Louis C.K
https://colleague.co.kr/forum/view/580519
해당 인용구는 강덕구 선생님이 콜리그에 기고한 글에서 인용한 문구입니다. 강덕구 선생님의 글은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루이CK의 작품 중 <호레이스와 피트>를 중점으로 다루다 보니 루이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짧게 언급되어 아쉬운 마음에 부족한 글이라도 작성하기 위해서 블로그를 켜봤습니다.제가 참고할 레퍼런스는 루이 CK 공식 홈페이지에서 서비스되는 스탠드업 코미디쇼 <Sorry> , <Sincerly>, 그리고 <Back to the garden>를 포함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입니다. <Back to the garden>은 공개된지 2주도 되지 않아서 국내에 본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굉장히 재밌습니다. 다만 앞선 두 작품과 다르게 스트리밍 서비스로만 볼 수 있어서 영어자막이 없습니다. 앞선 두 작품에는 영어자막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다만 한글자막은 세작품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의역이 조금 있을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시작해보겠습니다.
루이 CK는 <Sincerly>에서 "힘든 상황이 되면 진짜 친구가 누군지 알게된다"는 말이 사실이라 말하며 그것이 좋은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도대체 누가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냐고 말하면서요. '멋있는 친구'도 아니고, '재밌는 친구'도 아닌 그냥 '진짜 친구'를 누가 원하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루이의 농담 구조가 '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강덕구 선생님의 지적과 같은 궤도에 위치합니다. '진짜'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널 위해 여기 있어 ㅠㅠ"
"그건 나도 알아 새끼야..."
그러나 루이는 자각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루이는 자각 '이후' 에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애플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제품이 노동 착취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에 놓여지는 선택의 기로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착하게 굴면서 양초와 말을 타고 다니던가, 그들의 고통에 외면하면서 깨끗한 변기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사람들에게 악플을 쓰던가요.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루이의 농담은 자각 이후에도 자각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인간들에게 한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각 '이후'에 자각 이전보다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선택지를 택합니다. 따라서 루이가 관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위선자(hypocrite)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젝-헤겔적 변증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모순을 자각한 이후에도 모순을 강화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지젝의 헤겔 해석과 동일한 구조로 루이는 유머를 말합니다.
선택을 말하기 앞서 자각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루이는 사람들이 끔찍하고, 더러운 것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루이는 끔찍하고 더러운 것들을 유머의 소재로 활용하고, 그 중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주제는 소아성애입니다. <Sorry>에서 미국이 소아성애 범죄를 예방할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고작 하는 일이라곤 10000명이 넘는 소아성애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오케이 이제 넌 잘라야 되겠다" 라고 하는게 전부이죠. 루이는 왜 소아성애지 금지 표지판은 없냐고 묻습니다. 금지판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겠냐는 겁니다. 뭐라도 시도해보라는 것이죠. 그 다음에 루이는 해결책으로 "매우 사실적인 소아성애 인형"을 만드는 것 어떻냐고 관객들에게 제안합니다. 관객들이 (당연하게도) 야유하자 루이는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 자식들이 강간당하게 내비 두세요" 라고 말합니다. 관객들의 반응을 루이는 "어후 차라리 내 자식을 강간해, 그런 인형을 만들지 말고" 라고 요약합니다. 루이는 여기서 소아성애의 피해 아동들을 관객들의 자식이라고 가정합니다. 소아성애를 외면하는 관객들을 피해자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유머를 구사합니다. 이어지는 농담은 보다 직접적입니다. 보이 스카웃의 인솔자가 가장 소아성애자 범죄에 유리한 사람이 아닐까요? 라고 질문하면서 루이는 실제로 보이스카웃 인솔자가 소아성애 범죄에 연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자답합니다. 잘 모르겠는 이유는 "찾아보기 두려워서"라고 대답하죠. 루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제를 찾아보는 것도 두려워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야?(How do you solve a problem if you're afraid to fuxxing look it up?). 소아성애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보이 스카웃의 인솔자가 아이들에게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소아성애자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라는 루이의 질문은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 더럽고 비천한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으로 번역됩니다. 루이는 언제나 우리의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믿는 삶의 이면에는 더럽고 비참한 것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루이는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설교하는 계몽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루이의 개그는 자각 '이후'에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자각 '이후'의 자각. 예를 들어볼까요. 마이클잭슨은 훌륭한 음악을 만든 소아성애자입니다. 여기에 선택지가 두개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소아성애자' / '그렇지 않은 소아성애자' 우리가 고른 경제적 선택지는 전자입니다.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소아성애자 라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에도, 그의 음악을 선택합니다. "No pedophiles"는 선택지에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소아성애자가 만든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선택입니다. 마이클잭슨이 소아성애자든 아니든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선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보다 논쟁적인 예시를 들어볼까요.
<루이 2017> 에서 루이는 낙태에 찬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낙태는 둘 중 하나입니다.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똥을 싸는 것과 동일한 것이거나" 루이는 낙태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루이가 문제를 삼는 것은 전자라고 생각하면서 낙태에 찬성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주장입니다. 낙태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최대한 자제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루이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것인데 왜 자제되어야 하냐"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Back to the garden>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낙태가 합법적이고 안전한데 왜 자제되어야 할까요? 이것은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 조차, 낙태가 '아이를 죽이는 것'이라고 자각하면서 동시에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낙태가 '아이를 죽이는 것'이라고 자각한 '이후'에도 아이를 죽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시에 그 선택을 외면하기 위해 최종 심급으로서 도덕적 단서를 달아놓습니다. "낙태는 자제되어야 한다" 루이는 이 도덕적 단서를 더러운 방식으로 비틉니다. "낙태는 언제 어디든 허용되어야 하지만 낙태를 한다면 태아를 먹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 합니다. 낙태를 자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제시하는 루이는, 이정도 쯤은 되어야 낙태를 자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폭력적인 선택을 자제하기 위해서는 더 큰 폭력과 역겨움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루이가 인간의 비천함만을 얘기하면서 세상을 비관하는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이 쯤에서 루이의 말을 응용해볼까요 "인간이 잔인한 존재라는 사실을 찾아보는 것도 두려워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야?"
루이는 2017 SNL에 등장해 소아성애를 초콜릿에 비유해 논란에 휩싸인적이 있습니다. 루이는 해당쇼에서 소아성애에 관한 농담을 이어가던 중, "누가 만약 나에게 A라는 초콜릿을 먹는다면 너는 평생 직장을 가지지 못하고 더럽고 역겨운 인간이라고 낙인 찍힐거야 라고 설명한다면 나는 절대로 A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누군가가 A를 먹는다면, 적어도 그사람에게는 A라는 초콜릿이 엄청나게 맛있다는 것이 아닐까?"라고 질문합니다. 해당 농담은 루이쇼의 일반적인 수위와 비교했을 때 문제될만한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초콜릿과 소아성애라는 범죄를 비교할 수 있냐며 분개했죠. 사람들은 소아성애 범죄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아성애자들의 마음을 찾아보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역겹고 비천한 그들의 마음을 살펴볼 이유가 없다는 듯이 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해결책이 외부에 있지는 않습니다. 해결책은 앞에도 뒤에도 없습니다. 오직 내부에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루이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문제만을 집요하게 탐색합니다. <Sincerly>에서 루이는 다리가 없는 장애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다리를 잃은 가상-현실의 인물을 가정하면서 농담을 이어가던 중 마지막에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에서 다리를 잃었다는 가정을 추가합니다. 보스턴 테러 사건은 2013년 4월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이며, 미국인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 사건입니다.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지자 루이는 관객들에게 '여기에 위선자가 많네(a bunch of fuxxing hypocrities apparently)' 라고 대응하면서 "몇초전까지만 해도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장애인을 놀리다가, 갑자기 그렇게 특정해서 놀리면 안된다고?" 라고 응수합니다. 가상의 장애인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건 괜찮지만, 구체적인 사건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서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루이는 모든 장애인을 평등하게 놀릴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정립한 농담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루이는 "난 다리가 두개 있는게 너무 좋다"고 말하며, 다리가 없는 건 쓰레기같은 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강덕구 선생님의 글에서 언급된 '자각'의 기본적인 구조를 반복한 농담입니다. "백인으로 사는게 너무 좋아" "남자로 사는게 너무 좋아" "비장애인으로 사는게 너무 좋아" 루이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말하지는 않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백인/남자/비장애인의 특권과 지위를 코미디쇼에 개입시킵니다. 그러나 루이의 농담은 PC주의자들의 도덕적 훈계와는 정반대로 향합니다. 백인/남자/비장애인이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PC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루이는 그 특권이 너무 좋고 자신은 절대로 그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자각 '이후'의 선택은 자각의 내용에 포함된 폭력과 이기심과 모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갑니다. 따라서 특권을 도덕적 당위와 연결하는 모든 주장은 루이에게서 힘을 잃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특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특권을 자각한 '이후'라면 더더욱 포기하지 않습니다. 루이가 보기에 인간이 역겹고 더러운 존재인 이유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 이것이 특권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특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을 택한 자신을 외면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루이 CK의 드라마 <호레이스와 피트>가 보여주는 세계는 여기에 위치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로 연루되어 있으며, 그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만이 인간성을 규정합니다.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할때만이 인간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지젝의 책을 한권이라도 읽어본 독자분이라면, 여기서 지젝의 주장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주체는 결여와 다름 아니다") 루이는 "다리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는 자명한 진실을 외면한 채, 장애인들을 긍정하고자 하는 사회적 시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He is amazing. He lost his legs but He won the leg having contest!"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놀랍고 대단해지기 위해서는 다리 갖기 대회에서 우승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리를 잃은 장애인의 실질적 삶을 자세히 보고싶어 하지 않습니다. 대충 앞에 세워두고 박수를 쳐준뒤 치워버립니다. 인간은 모두 다리 잃기 vs 다리 가지기라는 선택지에서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전자는 피해야 하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외면하기 위해 끔찍한 삶을 긍정적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루이는 그들의 이면과 심층은 외면한 채 우리가 볼 수 있는 표층만을 사포질하는 사회의 선택을 조롱합니다.
루이가 제시하는 선택은 언제나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립되는 2가지 선택지 중에서 루이는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코로나가 극심하던 시기에, 너가 지금 외출한다면 수백만명이 죽는다고 설명해도 외출하기vs집에있기를 제시한다면, 미국인의 대부분은 외출했습니다. 루이에 따르면 인간은 차도로 달려가는 거북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가 달리든 말든 차도를 건너다 죽는 거북이처럼, 누군가 죽든 말든 인간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죽음에 가까운 선택만을 합니다. '아직 죽지 않은 인간'만이 살고 있는 세계는 끔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루이는 인간이 세계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택한 '신'에 대해 농담합니다. 여기서 강덕구 선생님이 글에서 <호레이스와 피트> 와 '파스칼의 내기'를 연결시킨 선구안에 감탄해야될 것 같습니다. 루이는 <Sincerly>에서 파스칼의 내기를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신이 없지만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나 신이 있는데 신을 믿지 않는다면 엄청난 불이익이 따른다 따라서 신은 믿는 것이 이익이다" 와 같이 요약되는 파스칼의 내기를 루이는 약간 변용합니다. 루이는 자기는 신을 믿지 않기에, 신이 없다고 간절히 빌고있지만 동시에 신을 믿지 않는사람들은 죽으면 그저 쓰레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신을 믿는 멍청한 인생은 죽은 뒤에 구원받거나 나빠도 잠깐 실망하는 것에 그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인생은 지옥불에 빠지거나 쓰레기가 되는 것 뿐입니다. 여기서도 루이는 지옥불에 빠지거나 쓰레기가 되는 비참한 선택을 반복합니다. 비참한 세계를 비참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이, 우리는 인간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고귀하고 합리적인 신이 만든 작품이라는 환상은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신은 우리의 세계에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오직 죽지 않은 인간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이 비참하고 천박한 것이라는 자각이야 말로 고귀한 인간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일지 모르겠습니다. 충만함에서 벗어나 끔찍함, 비참함, 외로움, 더러움, 천박함, 잔인함, 이기심에 집중하세요. 우리는 보기 흉한 상처들을 통해서만 인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그너의 말로 글을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을 낸 창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