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와 '트러블 위드 더 커브'의 이야기
야구 모르는 아내도 재미있게 보는 스포츠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한 장면이다.
백승수 단장이 고세혁 팀장에게 드래프트 비리에 대해 캐묻자 고세혁은 이렇게 항변한다.
"기록엔 안 나오지만 옆에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성실성, 교우관계, 승부처에 강한가. 건강상태 등등.. 그런 거 나하고 친하다고 나한테만 알려주는데 그게 바로 무책임만 직무유기지?"
하지만 고세혁은 이창곤의 폭로와 시스템을 중시하는 백승수 단장의 결단 속에 스카우트 팀장에서 잘린다.
백승수 단장은 고등학교 팜 선수들에게 인간적인 부분으로 다가가는 양원섭에게도 "휴머니스트랑은 일 안 합니다"라며 몇몇 사람의 역량과 인맥으로 흘러가는 팀이 아닌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팀으로 만들어나간다.
꼴찌 팀은 꼴찌를 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야구팀 (회사나 조직도 해당될 수 있다)은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를 '부상, 몇몇 스타 선수의 부진, 감독의 삽질' 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처방은 단기적인 효과를 기대할 순 있지만 결국 같은 문제가 재발되어 발목 잡는 경우가 많다. 희생양이 되는 개인만 양상 하고, 다들 그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복지부동하거나 정치에 매달리는 부작용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스토브리그'는 팀원들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고 말한다. 백승수라는 인물은 사적인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고 징계를 내리면서도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선택을 한다. 그는 이 문제를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찾아내려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그것보다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것이야말로 팀이 잘 돌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스템만 잘 갖춘다면 만사형통일까?
우리나라에선 '내 인생 마지막 변화구'란 이름으로 개봉한 2012년작 영화 'Trouble with the Curve' 란 영화의 한 장면이다.
수십 년 동안 야구 스카우트로 활동했던 거스 로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은 최고의 스카우트로 명성을 날렸지만, 고령의 나이와 변화하는 야구 환경 때문에 퇴물 취급을 받는다. 이젠 스카우트 개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고 세이버매트릭스로 분석된 기록들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마지막 야구 여행이라 생각하고 스카우트 여향을 떠난 로벨은 그곳에서 우연하게 최고의 투수 재목을 찾는다. 고등학교나 대학 리그에서 뛴 경험이 없어 기록도 없지만 최고의 투수가 될 것이라 직감한다.
하지만 팀은 젠트리라는 대학 최고의 타자를 영입하려 한다. 대학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타구 분포도나 삼진/볼넷 비율 등 기록상 약점이 없는 타자였다. 로벨은 젠트리의 스윙 궤적으론 커브는 절대 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팀은 그런 '주관적인 판단'을 믿지 않는다. 결국 로벨은 젠트리의 워크아웃 장소에 자신이 발견한 선수를 데리고 나타나 자신이 맞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2019년 초까지 첨단 장비와 세분화된 시스템을 구축한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모든 팀들에게 '모범적인 팀'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잘 짜인 시스템이라도 그걸 리드하는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경우 제지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한정적이라는 것도 증명됐다.
첨단 장비를 활용해 잘못된 장소에서 상대 싸인을 캐치하고 잘 짜인 시스템으로 아무도 모르게 이 정보를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프로스포츠의 공정성이란 무엇인지 개탄하는 계기가 됐다.
사람에만 의존해선 안되지만,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내부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합의해가며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합의하고 언제든 의사결정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면 그 팀은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