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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츠파이 Jul 21. 2020

코로나19시대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자세란?

전쟁도 이겨냈던 레전드들

트라웃의 리그 참여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다

코로나19 여파로 넉 달 가까이 개막이 연기됐던 MLB가 오는 24일 개막한다. 


물론 전지구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졌고 개막이 넉 달 가까이 미뤄지면서 정상적인 시즌으로 진행되지 않고 대부분 같은 지구 팀들과 맞붙는 60경기짜리 미니 시즌으로 진행된다. 예년 일정의 37% 수준으로, 선수들도 정해진 연봉에서 딱 37%만 받는다. 이에 따라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연봉도 대폭 삭감이 불가피하다. 올해 2000만달러의 연봉을 계약한 류현진은 740만달러를, 2100만달러를 받기로 했던 추신수는 777만달러를 받는다.


아예 시즌 참여를 거부한 선수들도 많다. 개인적인 불안감을 비롯해 가족의 건강 등 다양한 이유로 라이언 짐머맨과 조던 힉스, 조 로스, 마이크 리크,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불참을 선언했고 현재 MLB 최고의 선수인 마이크 트라웃도 임신한 아내 때문에 불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저 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연봉을 포기해야 하지만, 이들은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며 2020년 야구를 포기했다. 


이번 경우처럼 비정상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한 경우는 의외로 많은 편이다. 가깝게는 1994년과 1995년 MLB 파업으로 인해 256경기가 취소됐고, 리그가 취소되진 않았지만 세계대전과 6.25 전쟁 속에 군에 입대해서 전성기 시절을 전장에서 보낸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선수들은 작던 크던 커리어에 피해를 입었다. 



 1. 요기 베라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이자 감독인 요기 베라는 1943년 마이너리그 노포크 타르스팀에 데뷔해 타율 .253-7홈런-장타율 .396를 기록했다. 팀 동료들 중 2개 이상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 활약이었고 조만간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시화될 것이라 기대를 품었지만, 다음 해 메이저리그가 아닌 해군으로 향한다. 


대공포 사수 보직이었던 베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투 보트의 기관총 사수로 참전해 상륙하는 아군들을 엄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메이저리그 데뷔가 성사된 베라는 데뷔 시즌인 1946년 7경기에 출전해 22타수 8안타 2홈런, 타율 .364-장타율 .682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 시즌 동안 2,150안타-358홈런-1,430타점을 기록했다. 


만약 예정된 대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면 베라의 데뷔 시즌은 1946년이 아닌 1944년이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도 포수로써 누적 스탯 1-2위를 다투고 있지만, 더 압도적인 기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2. 테드 윌리엄스

요기 베라가 전쟁 때문에 데뷔가 늦어진 케이스라면 테드 윌리엄스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던 전성기 5시즌을 군 복무로 봉사했다. 22살에 맞은 1941시즌 이미 타율 .406-37홈런-120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장인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1943~45시즌을 군 복무로 희생했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는 식의 미담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징집 대상이 된 윌리엄스는 당초 바로 전장에 투입되는 1-A등급을 받았지만, 혼자 계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항소해 연기가 가능한 3-A등급을 받는다. 이로 인해 대중의 시선은 사늘해지고 광고 계약이 끊기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단순히 군 복무가 아닌 전쟁 참여를 피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이기에 미담이란 게 존재한다. 


한차례 입대를 연기해 1942시즌을 마칠 수 있었지만, 결국 1943년 해군에 입대해 비행기 조정수 보직으로 3년간 복무한다. (미국은 해군 내에 육-공-해군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물론 전장 최일선을 누볐다기보단 대기 조종사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전쟁이 끝나가는 1945년엔 해군 리그에서 조 디마지오-조 고든과 함께 야구 리그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8개 팀이 뛰었던 해군 리그는 매 경기 4만명에 가까운 관중을 동원하며 MLB 경기보다 많은 관중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군 복무가 끝난 1946년 리그로 돌아온 테드 윌리엄스는 32살이 되는 1951년까지 6 시즌 동안 196홈런-746타점을 터트리며 2번의 MVP를 수상한다. 여전히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고 있던 1952년 윌리엄스는 동양의 먼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바로 한국에서 터진 6.25 전쟁이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예비군임에도 입대를 신청한 윌리엄스는 1952시즌 6번째 경기가 끝난 뒤 한국으로 떠난다. 죽을 수도 있는 야구 영웅을 위해 윌리엄스가 팀을 떠나는 날 펜웨이파크에선 '테드 윌리엄스 데이'를 열어 환송했다. 


예비 병력이었던 2차 세계대전과 달리 6.25 전쟁에선 전장에서 비행기 조정수로 38차례 임무를 수행하는 등 목숨을 건 비행을 했다. 1953년 2월 16일, 윌리엄스는 평양 남쪽 보급 기지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귀환 도중 대공포에 맞은 윌리엄스는 가까스로 수원비행장까지 날아와 겨우 동체착륙에 성공했다.


1953년 7월말 휴전 협정이 맺어지자 윌리엄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8월부터 리그에 복귀한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경기 나섰지만 1953년 37경기에서 타율 .406-13홈런-34타점을 기록하며 괴물 같은 타격감을 과시한다. 41살에 은퇴한 1960년에도 .316-29홈런-72타점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타자였지만 전성기 시절 잃어버린 5시즌의 기록은 선수 개인에게 매우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테드 윌리엄스의 4할 타율 시즌이 한두차례 더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적 스탯으로 따지더라도 역대 타점 1위 자리의 주인공은 테드 윌리엄스의 차지였을 수 있다. 


3. 밥 펠러

팝 펠러는 1936년 17살의 나이로 MLB에 데뷔했다. 클리블랜드 소속으로 1938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한 펠러는 1941년까지 4시즌동안 93승을 따낸 에이스였다. 22살의 나이에 이미 100승 가까운 승수를 쌓은 것이다. 


클리블랜드와 10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을 맺은 당일인 1941년 12월 7일, 펠러는 말기암인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군 복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뒤 펠러는 미 해군에 자원입대를 신청하며 미국 최초로 프로스포츠 선수 출신 군인이 됐다. 아버지의 건강 문제와 청력 검사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아 전쟁 초기엔 훈련소에서 체력 단련 강사를 하거나 해군 리그 야구 선수로 시간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엔 오히려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웠다. 1943년 1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지만 8월부터 험난했던 태평양 함대에 배정되었고 갈바닉 작전과 필리핀해 전투 등에 참전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1월 이후엔 후방에 배치되어 선교 임무나 해군 야구리그 코치로 활동했다. 


한창 좋은 공을 던지던 23~25살 시즌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전쟁을 마치고 복귀한 1946시즌 26승 15패, 평균자책 2.18로 다승과 탈삼진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1948년엔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펠러는 37살의 나이까지 현역으로 뛰며 통산 266승을 거뒀다. 만약 군 복무가 없었다면 펠러는 누적 스탯에서 300승-3000탈삼진은 무난하게 넘었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시 기준으로 100마일에 가까운 속구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강속구 투수였다. 


4. 윌리 메이스 

통산 660홈런을 터트려 이 부분 5위에 랭크되어 있는 메이스는 (알버트 푸홀스가 2019시즌 종료시점 656홈런을 기록 중이라 새로운 5위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데뷔 시즌인 1951년 .274-20홈런-74타점을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로 징집 대상이 된 메이스는 11명의 부양가족이 있다며 3-A 등급을 신청했지만 부양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집 대상에 포함됐다. 1952년 34경기를 뛰고 육군에 합류한 메이스는 테드 윌리엄스처럼 한국 본토로 넘어와 전장을 누빈 것은 아니지만 1952~52시즌을 병역으로 희생해야 했다. 


만약 두 시즌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다면 메이스의 통산 성적은 급이 달라졌을 수 있다. 정상적인 평균 수치를 대입할 경우 700홈런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4명의 선수 이외에도 전설적인 좌완투수인 워렌 스판도 군 복무 때문에 25살의 나이가 돼서야 MLB에 데뷔했고 '양키스의 전설' 조 디마지오도 28살이었던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대전 참전 때문에 경력에 구멍이 났다. 전쟁 케이스는 아니지만 '테드 윌리엄스 이후 가장 4할에 가까이 갔던 타자' 토니 그윈은 1994년 리그가 도중 중단되기 전까지 .394의 타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반기에 .423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감이 살아나고 있는 와중에 리그가 중단되어 그윈의 기록 달성 실패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겼다. 


코로나19로 인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단기 시즌을 맞이한 2020시즌을 선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몇십 년이 지난 이후 현대인들이 테드 윌리엄스나 밥 펠러를 추억하는 것처럼 전 지구를 공포로 몰아넣은 질병에 맞서 그라운드를 누빈 이들의 스토리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단기 시즌이지만 이들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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