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에 방지턱 설치하기

말을 천천히 하는 것만으로도 바뀌는 것들

by 행복한자유인

저는 자타공인 '짜증 전문가'입니다. 짜증을 잘 다루기보다는, 누구보다 빠르고 빈번하게 내는 쪽이죠. Big5 성격 요인 중 신경성이 높은 탓인지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평안이 쉽게 무너집니다. 유전적 영향인가 싶을 만큼 가족들도 비슷합니다. 어쨌든 이 높은 신경성은 참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 고질적인 습관을 이겨낸 아주 작은 성공 경험 하나를 공유해보려 합니다.


어느 날 오후, 슬슬 짜증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속도는 나지 않는데 병원에 다시 가야 했고, 집은 엉망인데 아이들 저녁까지 차려야 하는 상황이었죠. 배고픔과 피로가 섞여 신경질의 온도가 급상승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럴 때 제 입에선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옵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 듣기 싫은 말투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찰나의 순간 저 자신을 감지했습니다. '아, 나 지금 짜증이 났구나.' 평소처럼 참으려고 애쓰는 대신, 아주 단순한 방법을 써보았습니다. 바로 말을 천천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은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을 천천히 하니, 분노를 향해 질주하던 짜증의 길에 단절이 생겼습니다. 그 단절 사이에 친절을 조금 섞을 수 있었습니다. 짜증의 급상승이 멈춘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 나 좀 훌륭한데?"라는 대견함이 느껴졌고, 스스로를 칭찬했습니다. 그 기분 좋은 성공의 감각은 하루 종일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짜증이 느껴질 때 말을 천천히 해보고, 천천히 말하고 있는 나를 느껴본다면 짜증의 급상승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짜증이 짜증을 불러오고 더 큰 짜증으로 공명하는 것처럼, 반대도 가능하다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는 짜증 날 때 혹은 신경질 날 때, 말을 천천히 해보려고 합니다.


근데, 제 경험이 근거가 있는 이야기일까요?


이 경험은 심리학적으로도 명확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몸의 상태에 따라 감정을 재해석하는데, 이를 안면 피드백 가설(Facial Feedback Hypothesis)이라 부릅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원리입니다. 짜증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천천히 하고 부드럽게 내뱉으면, 흥분해 있던 뇌는 "어? 화를 낼 상황이 아닌가 보다"라고 판단하며 흥분 수치를 낮춥니다.


또한, 천천히 말하기는 짜증이라는 고속도로에 설치한 방지턱과 같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압력밥솥의 증기 구멍을 막는 것과 같아 결국 폭발하게 되지만, 말투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폭발을 지연(Delay)시키고 이성적인 생각을 할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그 방지턱 덕분에 생긴 여유가 '짜증'으로 갈 핸들을 '친절'로 꺾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이죠. 천천히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호흡이 깊어지고 조절되어야 합니다. 이는 신체를 이완시키는 부교감 신경을 자극하여, 신경질의 물리적 토대(심박수 증가, 근육 긴장)를 무너뜨립니다.


짜증이 짜증을 불러오며 공명하듯, 작은 성공의 감각도 공명합니다. 감정에 휘둘리던 내가 감정을 조절했다는 감각은 뇌에 강렬한 도파민 보상을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입니다. 한 번의 성공 기억은 다음번 짜증이 몰려올 때 "저번에도 천천히 말해서 이겼잖아?"라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줍니다.


혹시 지금 짜증이 차오르나요? 참으려고 애쓰기보다, 딱 한 문장만 아주 천천히 말해 보세요. 그 작은 속도의 차이가 당신의 하루를 바꿀 방지턱이 되어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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